최종편집 : 2024-04-28 20:00 (일)
[최기영의 세상이야기] 위정자들이여, 선비의 면모(面貌)를 배우고 익혀라
상태바
[최기영의 세상이야기] 위정자들이여, 선비의 면모(面貌)를 배우고 익혀라
  • 최기영 박사
  • 승인 2016.12.08 10: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림(漢林) 최기영 박사]

[한국정경신문=최기영 박사] 선비란,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 역사속의 대표적인 선비로는 고려의 삼은(三隱)을 손꼽을 수 있다. 오늘은 선비중의 선비라 말할 수 있는 야은(冶隱) 길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려한다.

포은(圃隱)정몽주, 목은(牧隱)이색과 함께 고려조 삼은중의 한 분인 야은은 고려의 옛 도읍지인 개성을 둘러보며 자신이 섬기던 고려왕조의 멸망의 한과 인생의 무상함을 이렇게 노래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태조 이성계의 세자인 이방원과 평소 친분이 있던 선생은 방원의 태상박사직의 제안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말하며 고사하고는 낙향하여 후학의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기개 있는 선비의 진면모(眞面貌)를 보여주는 대목인 듯싶다.

금오산인(金烏山人)이란 이름으로도 불리는 야은 길재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희귀한 성씨인 이 길 씨는 단일본이며, 시조는 고려 문종 때 중국에서 귀화한 팔학사(八學士)중의 한사람인 길당(吉瑭)이다. 해평 길 씨의 집성촌으로는 예로부터 남쪽에는 경북 구미와 북쪽에는 평남 맹산이 유명하다. 참고로 평남 맹산은 시대의 지성이자 자유의 파수꾼인 김동길 교수님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희성(稀姓) 내지는 귀성(貴姓)에 속하는 길 씨 중 근대의 유명인을 소개해보자면,

독립운동을 하던 영계(靈溪)길선주 목사가 있다. 평남 안주 출생인 그는 당시 평양에서 중심적인 교회였던 '장대현교회'를 크게 부흥시켰으며, '눈 먼 자의 사랑'으로 유명한 한국 최초의 영향력 있는 개신교 목회자였다. 길선주 목사는 3 ·1운동 때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하였고 해방이후 평양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반공투쟁의 중심적 역할을 하며 공산주의자들에 저항했다.

가요계에는 길옥윤이라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가 있었는데, 길옥윤이라는 이름은 물론 예명(藝名)이긴 하지만 최치정이라는 본명보다 길옥윤이라는 이름이 훨씬 유명해 흥미로울 수도 있을듯해서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 평북 영변 출신인 길옥윤 선생은 그 시절 평양고보를 나와 경성치전 그러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서울대 치대를 나온 수재였는데, 대학시절 다방면으로 너무도 재주가 많은 분이었다고 내가 잘 아는 서울대 치대 동기였던 김창욱 박사께서 말씀해 주셨다. 길옥윤 선생은 가요계에서도 수없이 많은 히트곡을 만들었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 여가수 패티김의 전 남편이자 1970년대 최고의 디바 혜은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패티김이 부른 명곡 <사월이 가면> <사랑하는 마리아> <서울의 찬가> <이별> 또 혜은이의 히트곡 <당신은 모르실 거야> <당신만을 사랑해> <감수광> 등 약 3500여곡의 노래를 남기고 떠난 한국 가요계의 전설이다. 여담이긴 한데, 한때 술 좀 좋아했던 애주가들은 대개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길옥윤씨는 1980년대 강남 신사동에 '창고(倉庫)'라는 당시 강남에서 상당히 유명한 술집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설총,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손꼽히는 강수는 그와 오래 동안 교제하던 비천한 출신인 대장장이의 딸을 아내로 맞으려하자 그의 아버지가, “너는 지금 명성이 있어 모르는 사람이 없거늘, 미천한 여인을 짝으로 삼으니 부끄럽지 아니한가!” 라며 아들을 만류하자 이에 강수는,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워할 바가 아니지만, 도(道)를 배우고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부끄러워할 바입니다. 일찍이 듣기를, 옛 사람의 말에 지게미와 쌀겨를 먹으며 고생한 아내(조강지처糟糠之妻)는 집에서 내보내지 않고, 가난할 때 친하였던 친구(빈천지교貧賤之交)는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차마 버리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의리를 지키는 선비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저 건너 일편석이 강태공의 조대로다
문왕은 어디 가고 빈 대만 남았는고
석양에 물차는 제비만 오락가락 하더라

조선시대 선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정암(靜庵) 조광조가 읊은 유명한 시조이다. 그는 선비의 마음 씀씀이를 지적하여, “무릇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하여 도모하며, 일을 당해서는 과감히 실행하고 환난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 바른 선비의 마음 씀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소인의 태도를 “자신을 위하여 도모하는 데 깊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주도한 자는 감히 저항하는 지조와 곧은 말로 원망과 노여움을 부르지 못하며, 머리를 숙여 아래 위를 살피고 이쪽저쪽을 주선하여 자신을 보존하고 처자를 온전히 하는 자가 대개 많으니, 이들은 왕을 섬기고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지적하였다.

한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최순실의 국정농단사건으로 청문회가 한창 진행 중이다. 질문을 하는 정치인들도 답변을 하는 증인들도 뼛속까지 나라를 걱정하는 자세로 보이질 않는다. 정치인들은 본인 개인의 이름을 떨치고 싶은 의욕에 앞서 사건의 본질과 국민들의 분노를 대신해 임하지 않음이 안타까울 뿐이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출석자들의 시건방진 태도나 본인의 행동이 나라 전체를 어지럽게 만든 실로 엄청난 일이었음을 깊이 반성하는 태도도 아니다.

후세의 사가들은 오늘의 이 사건을 두고 어떻게 평가할지가 궁금하다.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어야만 하는데 그러기엔 상당부분 부족함도 많아 보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