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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글로벌스타 바비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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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글로벌스타 바비 김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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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바비김(왼쪽)과 이소룡(오른쪽)과의 기념사진
▲ 1969년 바비김(왼쪽)과 이소룡(오른쪽)과의 기념사진

이소룡의 친구로 알려진 바비 김은 1941년 생으로 박우상 감독의 1975년작 <죽음의 승부>로 데뷔한다. 당시 인기를 끌던 태권영화의 주인공으로 화려한 신고식을 하고 한용철과 더불어 쌍두마차로 인기를 끈다. 바비 김의 등장으로 태권영화는 전성기를 맞는데 태창흥업에서 계속 <독사>, <국제경찰>, <왕룡>, <귀문의 왼발잡이>, <사대독자> 등의 영화에 출연한다.

그는 찰스 브론슨을 연상시키는 콧수염으로 중후하면서도 믿음직스러운 정의의 사도 역을 맡아 인기를 끌었다. 특히 태권도 사범다운 화려한 기술로 스크린을 압도하였는데 그의 데뷔로 태권도 영화는 정점에 올랐고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덴버시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며 교민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며 영화 속에서 보여준 정의 사도 역할을 현실에서도 계속한다.

바비 김의 형이며 시나리오 작가인 김학경과 미국에서 <만주리안의 복수> 등의 영화를 제작했고 <차이나 타운> 등의 출연작이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출연작 마다 보여준 큰 형님같은 이미지로 영화를 통하여 무술인의 표상이 됐다. 바비 김은 한국이 낳은 태권도 스타이다. 그는 한국영화 뿐만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미국영화에도 출연한 국제적인 배우이다.

그의 본명은 김웅경으로 서울 마포에서 태어나 용강초등학교와 동도공고, 우석대 영문과를 졸업했는데 대학 재학 중부터 동두천에서 미군들의 태권도 교관을 지냈다. 바비는 로버트란 이름의 애칭이다. 그는 어려서 부터 이민 등의 영화배우를 동경하였고 집안 어르신들의 반대에도 꾸준히 태권도 수련을 하였다.

미군들의 태권도 교관을 지내던 중 그는 사진과 함께 50여 통의 자기소개서를 미국에 보내 1969년 미국 워싱톤 D.C.로 와 태권도장을 하게 된다. 당시 미국인들은 한국에서 온 바비 김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미국 여러 곳에서 태권도장을 열었고 현재 거주하는 덴버로 자리를 잡게 된다.

영화계 데뷔는 형인 김학경 시나리오 작가의 지인이 태창영화사에 소개시켜주어 국기원에서 무술시범을 보이고 10편의 계약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10편은 많다고 5편만 계약하고 첫 영화로 박우상 감독의 <죽음의 승부>를 찍는다. 이 영화는 1974년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되었고 당시 이소룡의 죽음으로 인한 액션영화 붐으로 인기를 끈다. 당시 이두용 감독이 챠리쉘(한용철)이라는 어린 캐릭터로 <용호대련>, <분노의 왼발> 등을 발표했는데 중후한 이미지의 바비 김이 등장해 맞불을 놓은 듯 액션영화의 붐은 최고조에 이른다.

바비김의 '죽음의 승부'
▲ 바비김의 '죽음의 승부'

<죽음의 승부>는 인천부두에서 촬영되었는데 권영문, 황정리(당시는 황태수) 등이 악역으로 출연했다. 그는 이후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수많은 태권영화에 출연하는데 같이 공연한 배우로는 허장강, 이해룡, 권일수, 김기주, 진봉진, 조춘, 김병기 등 남배우와 김옥진, 임은주, 나하영, 김지혜 등 여배우 들이다.

그와 함께 한 감독으로는 박우상 외에 고영남 심우섭이 있다. 고영남 감독과는 <왕룡> <국제경찰> 등의 영화를 찍었는데 서울과 강원도 등에서 두 편을 한꺼번에 촬영하였다. 촬영 중 긴박한 자동차 액션 장면을 찍으며 홍콩배우 나열과 카메라 맨 이석기 감독이 다치는 사고도 있었는데 시민권자인 그가 나서서 사고 책임을 졌고 제작부장이 경찰과 원만히 처리했다.

이후 남아진흥에서 이상구 감독의 <흑룡표>를 안길원과 공연하였고 태창영화사 김태수 사장의 간곡한 부탁으로 <대적수>와 <귀문의 왼발잽이>를 영월에서 찍게 된다. <귀문의 왼발잽이>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액션을 선보이기도 한다. 액션영화 촬영이란 위험한 작업인데 오토바이 뒷자리에 탔던 권영문 배우가 튀어오르며 떨어지는 사고를 겪기도 한다. 당시 촬영현장이란 안전장치도 없이 그야말로 몸으로 때우기였다.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영화계에도 진출하는데 <댕고라 히탐>에 현지인으로 출연한다. 이 영화는 복수극 액션영화인데 이 영화를 찍으러 홍콩을 다니며 정창화, 신상옥 감독과 교류를 한다. 신상옥 감독은 당시 한국에 귀국을 못하고 있었던 상황인데 홍콩에서 한 방을 썼었고 후에 콜로라도 주에서 <해적선?>이라는 영화의 헌팅을 했던 인연으로 그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신 감독이 탈북 후 미국에 거주할 때 워싱톤 D.C에서 다시 만났다. 신 감독은 <3닌자 키드>를 덴버에서 촬영해 미국에서 좋은 흥행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바비 김은 김학경 작가가 각본을 쓴 만주인의 서부극 무용담인 <멘츄리안 리벤지(만주인의 복수)>라는 미국영화에 공동제작자로 출연하였고 이 영화는 미 전역 상영 후 미국방송채널 HBO에서 방영되었다. 그 후 김학경 작가가 각본, 감독을 맡은 <킬 라인>에 제작자 겸 주연으로 출연하였으며 이 영화 역시 미 전역에서 상영되었다.

그는 이준구 그랜마스터가 주최한 무술대회에서 시범을 보이며 같이 시범을 보인 이소룡과도 교류를 하였다. 이때가 1971년인가 1972년인데 KBS에서 촬영을 하였다니 필름이나 테입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는 이후 김효천 감독의 <블랙벨트 엔젤스>와 박우상 감독의 <차이나 타운> 1,2편, 그리고 <KK훼밀리 리스트>에 출연하는 등 모두 15편 정도에 출연했다. 그는 태권도 그랜마스터이며 영원한 영화인이다.

▲ 바비김(오른쪽)과 필자(왼쪽)
▲ 바비김(오른쪽)과 필자(왼쪽)

2011년 나는 덴버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그는 친형님처럼 나를 따뜻이 맞아주었고 함께 눈 덮인 콜로라도의 로키산맥을 갔다. 그는 현지에서도 존경받는 이민자 선배였다. 그 같은 분들이 계셔서 한국의 태권도가 전 세계에 보급되고 한류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전 세계의 무도인들은 이소룡 그랜마스터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로 인해 쿵푸 뿐이 아니라 전 세계의 무술이 전파되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진정으로 존경받을 만한 무도인이며 내게는 친형님과 다름없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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