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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글로벌스타 양성오(타이거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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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글로벌스타 양성오(타이거 양)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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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월 LA에 있는 양성오(가운데)의 무예도 도장을 권영문(왼쪽) 배우와 함께 방문한 필자(오른쪽)
▲ 2015년 1월 LA에 있는 양성오(가운데)의 무예도 도장을 권영문(왼쪽) 배우와 함께 방문한 필자(오른쪽)

타이거 양으로 알려진 양성오 그랜마스터는 태권도 8단으로 처음 미국에서 이두용 감독의 <뉴욕 44번가>와 홍의봉 감독의 <코메리칸의 낮과 밤>에 출연하며 존재가 알려졌다. 당시 무술인 중에는 정말 인물도 많았다. 운동 좀 한다 하면 액션영화배우를 꿈꾸지 않았던 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건 바로 이소룡 때문이었다. 이소룡 보다 한 수 위를 자처하며 너도나도 은막에 데뷔했지만 실전과 영화연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적응을 하지 못하면 데뷔작이 은퇴작이 되었다.

경주가 고향인 그는 평양박치기로 유명한 아버지 밑에서 엄하게 교육을 받으며 절로 운동을 익히게 된다. 추운 겨울 냉수목욕을 시킬 정도인데 아버지 덕분에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갖게 되어 그야말로 호랑이 같은 무술인이 되는 계기가 됐다. 당시 권영문 배우도 경주에서 함께 운동을 했다.

양 그랜마스터는 부산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후 1970년 초에 미국 시카고로 건너가 태권도장을 개관한다. 그는 체육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화장실에서 목욕하는 등 갖은 고생을 하며 태권도를 전파한다. 처음 타 도장의 수련생이 찾아와 도전을 하는 등 텃세가 심했는데 그는 특유의 뚝심으로 무술시범대회에서 차력을 이용한 자신만의 무술을 선보였다. 그것은 당시 미국 무도계를 평정한 가라테가 보여줄 수 없는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의 차력은 주먹 위로 8톤 차가 지나가도 끄떡없는 수준이다.

척 노리스, 밥 월, 권부길 등 유명 무술인들이 초청된 무술 시범대회에서의 에피소드는 그가 미국에 와서 겪는 텃세를 실감했던 일화이다. 이 무술 시범대회에서 그는 괴물이라고 불리운 명성의 차력과 무예도 시범을 보여주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상대 도장에서 보낸 사람이 "누군든지 나와 쳐보라"고 하자 나와서 각목으로 급소를 가격해 실신지경에 이르렀지만 정신력으로 버티어 시범을 마무리하였다.

그는 이 일로 곧 유명스타가 되었고 도장이 6개로 늘어났다. 7년간 활동하던 그는 영화활동을 시작하는데 동양인으로서는 큰 키와 파워를 갖춘 그는 미국인들과 겨루기에서 밀리지 않도록 엄청난 파워와 기술로 그들을 제압을 했다. 미 CIA에서 태권도를 전파하며 그들을 놀래키며 실전무술로 태권도 발차기에 손기술을 개발하여 무예도라는 무술을 창시하게 된다.

그런 그가 홍콩으로 영화배우를 하겠다고 권영문 배우를 만났다. 그의 마스크는 악역이 제격이었는데 영화 출연이 쉽지 않았는데 당룡의 출연작인 <사망탑>에서 당룡의 상대역으로 호피를 두르고 당룡에게 맞서 싸우다가 허리가 부러지는 배역이다. 악역이라 하지만 오히려 코믹한 이미지가 강했는데 영화연기에 적응이 안 되어서 일수도 있다. 이대근 배우의 느낌이 강하다.

그는 아는 이 없는 홍콩에서 당룡과 호텔에서 한 방을 쓰며 반년 간 생활하였다. 당시 정창화 감독의 <흑무사(염굴신탐)>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유병용 그랜마스터도 있었다. 그 역시 홍콩에서 정착하지 못했는데 영화 연기에 익숙해지기 전에 촬영이 끝나버리니 화면 속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고 대략 편집하여 개봉한들 암만 주인공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너도 나도 운동 좀 했다하면 살아있는 이소룡을 자처했으나 죽은 이소룡이 살아있는 액션배우 지망생 수십 명을 잡은 형국이다. 그나마 당룡은 성공한 케이스이지만 그도 대역배우의 한계를 뛰어넘진 못했다.

양성오의 경우도 외국인이기에 좌충우돌식의 시행착오를 겪는데 결국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한 눈물겨운 성공기이다. 그후 홍콩, 대만에서 활동하던 이야기는 국내에 알려진 것과 달리 톱스타의 영광을 누렸다. 그동안 언론에 노출이 안 되며 소문으로만 듣던 이야기를 실제 들으며 개인의 역사 차원을 떠나 한국영화사에 꼭 올라야 할 사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역시 악역으로는 괜찮은 마스크였으나 반년 간이나 큰 배역 없이 버티려니 희망이 안보였을 수도 있다. 홍콩영화계의 쓴 맛을 실감하며 대만으로 가서 그의 특기인 차력으로 인기를 얻었다. 1978년 대만TV에 출연하며 한류 원조를 실감하는데 황가달과 친한 그는 대만에서 인기를 실감한다. 우부창이라는 극중 이름으로 활동한 그는 거리를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스타가 되어서 좋았지만 한두 달 지나니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미국으로 와서 몇 편의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였다. 미국에서 촬영 때에는 단역 배우들로 나온 조직원들이 맞고 쓰러지는 연기를 안 하자 그들에게 실제로 발차기를 하여 때려눕혔다. 그제서야 그들은 “돈 킬 미!”라며 사정을 하였고 그 앙심을 품고 밤 촬영 중에 공격을 하려했던 에피소드도 있다.

정치가가 꿈이었던 그는 미국에서 태권도를 전파하며 태권도인으로 국위를 선양한다. 그 세대가 그러했지만 그는 많은 시련을 극복해낸 그야말로 뛰어난 태권도인이며 동시에 무술배우였다. 지금도 LA에서 무예도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LA한인영화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출연작은 <뉴욕44번가>(1976), <코메리칸의 낮과 밤>(1977), <천하제일권(찬선생여과전화)>(1978), <쾌권괴초>(1978), <맹권귀수>(1979), <귀영신공>(1979), <사망탑>(1980), <조주소한>(1982) 등이다.

그를 권영문 배우와 함께 2015년 1월 LA에 그의 도장에서 만나 인터뷰하였다. 끝없는 도전정신은 그의 인생의 모토였다. 가진 것 없이 태권도로 무장하고 세계로 진출한 그들은 오늘날 한국이 있기까지 알린 일등공신이다. 그는 영화를 하고자 홍콩으로 진출하여 여러 고생도 있지만 미국영화에까지 출연하며 글로벌 스타로서의 영역을 확장하였다.

나는 그에 대한 글을 써서 이소룡기념사업회 카페에 올리고 졸저인 『한국무예배우열전』에도 소개했다. 그에게 직접 듣고 쓴 글이지만 다소의 오해가 있어 그가 자료를 국제 우편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런 열정적인 모습이 오늘의 그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2022년 5월, 서울에서 그의 자녀 결혼식이 있어 오랜만에 반갑게 만났다.

2020년에 자서전인 『타이거 양의 소낙비 그리고 무지개 인생』을 발간했다.(출처: koreatimes.com)
▲ 2020년에 자서전인 『타이거 양의 소낙비 그리고 무지개 인생』을 발간했다.(출처: koreatimes.com)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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