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8 20:00 (일)
[안태근의 다큐 스토리] 제1회 세미나 ② 녹취록 1
상태바
[안태근의 다큐 스토리] 제1회 세미나 ② 녹취록 1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0.0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0년 11월 27일, 제1회 이소룡 세미나가 개최됐다.
▲ 2010년 11월 27일, 제1회 이소룡 세미나가 개최됐다.

제1회 이소룡 세미나의 녹취록을 소개한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를 생생하게 느껴보기 위함이다. 장소는 서울 상암동의 한국영상자료원 3관이고 오후 2시부터 시작되어 늦저녁까지 개최됐다.

안태근: 오늘이 이소룡 탄생 70주년인데 부모님을 위해서 박수 한 번 쳐야겠습니다. 저는 EBS에서 영화사와 관련해서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하고 있고요, 이소룡 영화를 1973년 7월 27일 날 <정무문>이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되면서 보기 시작해가지고 개봉 첫 날 첫 회 제가 가서 봤습니다. 그래가지고 지금 37년 됐죠? 37년, 너무 금방 지나간 것 같은데 아직도 이소룡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소룡 전도사가 됐습니다. 외국에서는 이런 기념행사를 크게 여러번 가졌는데 우린 사실 그런 게 없었죠. 올해 <정무문>이 개봉된 7월 27일을 기념해서 제가 ‘브루스리데이’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그래가지고 행사를 저희가 가졌었고요, “70주년 탄생 기념일에도 한번 모임을 갖자” 해가지고 소박하게 그냥 작은 레스토랑에서 기획을 했었죠. 근데 70주년이니까 그렇게 해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늦게나마 여기 극장을 대관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큰 극장에서 제대로 홍보를 해가지고 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우선 아쉬운대로 이렇게 첫발자국을 떼고요, 향후는 좀 더 큰 행사가 될 수 있도록 제가 노력해보겠습니다.

지금 준비한 건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걸 거예요. 그렇지만 오늘 뜻깊은 날이니까 다시 한번 정리를 하는 차원에서 간단하게 20분 정도로 요약을 해보겠습니다. 지금 이소룡 관련해서 제가 책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조만간 계약이 되고 내년 초 쯤에는 나오지 않을까 생각 중인데요, 한국어 뿐만이 아니라 외국어로도 번역출판될 예정입니다. (PPT 보며)

이소룡은 미국에서 워싱턴대학교 철학과를 다니다가 중퇴했고 아내 린다 씨는 지금 재혼했고 아들 브랜든 리는 사망했고 딸 이향응, 샤론 리가 지금 브루스 리 파운데이션 이사장을 맡고 있죠. 이소룡 영화는 아시다시피 홍콩 흥행기록을 본인 영화가 본인 기록을 깹니다. 그래서 <당산대형>이 320여 만 홍콩달러의 흥행수입으로 최고 흥행기록을 했었고, 뒤로 가면서 그걸 또 깨고.. 뭐 하여튼 해가지고 그렇게 했고 한국에서는 73년에 개봉 돼가지고 56일만 상영해서 31만 명을 동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해 최고 흥행기록을 수집했죠. 당시 서울 인구가 500~65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당산대형>이 스카라극장에서 개봉됐었고요, <용쟁호투>가 2개 극장에서 개봉됐습니다. 그다음에 <맹룡과강>이 마지막으로 피카디리 극장에서 74년에 개봉됐죠. 제가 <당산대형> 예고편을 본 게 71년입니다. 근데 당시 수입이 안되고 개봉이 안됐는데, 그때 제가 처음으로 이소룡이라는 배우를 알게 됐었죠. 그다음에 짝퉁배우라고 그러죠? 여러 배우들이 나왔고 한국에서도 많이 나왔었죠? 그래서 이제 지금까지도 3D로 이소룡을 부활시키자는 그런 기획이 있었고 지금도 추진되고 있는 거죠.

몸값은 처음에 첫 출연료는 만 불 정도였다고 그러는데 그게 계속 올라갔고, 나중에 런닝개런티라고 해서 출연료를 받았죠. 이소룡은 여하튼 준비된 무술배우였다, 이런 국제적인 스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대 주연배우로 라열, 악화 이런 배우가 있었고요, 이 사람들 다음 세대가 강대위하고 적룡이었습니다. 근데 이소룡이 등장함에 따라서 이 사람들이 갑자기 다 인기가 떨어진 거죠. 정점에 올라셨고요. 한국은 신성일 배우가 톱스타였죠. 그 외에 신영균, 남궁원이런 배우가 있었고요.

사실은 이소룡으로 인해서 중국무술이 세계화된 것이죠. 그게 이제 중국무술뿐 아니라 유색인종에 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놨죠. 이소룡 인기의 원인에 대해서 제가 좀 조사해봤습니다. 그게 지금 이소룡 카페가 포털사이트마다 이제 100여 개 이상 성행합니다. ‘이소룡’ 치면 이렇게 뜨고요. 그 다음에 이소룡플러스라고 이 카페 회원이 지금 2만여 명에 이르는데 약간 떨어지지만 하여튼 이 정도 인원이고 조선일보 오늘 기사가 떴죠. 오늘 기사 보면 한 5만여 명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튜브같은 데 이소룡 영상이 뜨면 수백만에서 천이백만 이상이 기록되고 있는 거죠.

이소룡 인기의 원인은 이 사람은 영화배우가 무술을 보여준 게 아니라 무술인이 무술연기를 했기 때문에 인기를 끌지 않았나. 거기에 절권도라든지 쌍절곤, 이런 영화액션을 보여준 것이죠.

두 번째, 독창성이 뛰어난 사람이죠. 상상력도 뛰어나고. 보셨지만 너무 열정적이지 않습니까? 세 번째, 중국 무협영화의 협객과 영웅 이미지를 현대인을 통해서 영화로 재현해냈다는 것이죠.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너무 젊은 나이에 타계해서 그의 죽음에 대해 말들이 많죠? 여하튼 이건 미궁으로 남아있는 건데 하여튼 이런 것 때문에 이소룡이 이렇게 인기를 끌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잠깐 말씀을 드리면 제가 7월 20일, 거기에 있지는 않았지만 7월 20일이면 상당히 더운 날이겠죠? 더군다나 홍콩이고. 공식사인은 대뇌부종으로 알려져 있고요, 근데 이 분이 자기 영화가 흥행 기록을 계속 갱신하면서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 같아요. 거기다 또 절권도를 해서 타 무술 고수들이 계속 도전해왔고 이런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약 부작용과 같이 더해져서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여배우와의 염문설도 상당히... 그렇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다음 회에서 계속)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