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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년사] 이우석 회장의 외길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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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년사] 이우석 회장의 외길 인생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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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5일 충무로 모 식당에서 영화인 송년회를 개최하며 감사 인사를 받고 있는 이우석 회장
▲ 2022년 12월 15일 충무로 모 식당에서 영화인 송년회를 개최하며 감사 인사를 받고 있는 이우석 회장

18살에 극장살이를 시작해 영화계에서만 70년이다. "돈 벌려고 작정했으면 재벌 됐지" 그동안 또 다른 사업의 기회도 있었지만 오로지 외길 인생을 사셨다. 생수 사업 등의 기회가 있었지만 동업자가 사망하면서 "영화 하라는 계시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영화인으로서는 외화 수입, 영화 수출 및 제작, 극장 운영, 당룡(김태정) 캐스팅 후 홍콩에 추천, 영화 합작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돈을 벌려면 기회는 많았다. 일본을 오가며 될 만한 사업을 보았고 권유도 받았다. 롯데그룹의 신격호 회장도 만나 교류룰 하였으니 그에게는 분명한 인맥은 있었지만 부탁을 하지 않는 그의 성격대로 자신의 길만을 걸었다.

남들이 하던 부동산 투자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회영 기념관이 들어선 남산자락의 집도 강제 수용당하고 장충동으로 옮겨 사무실과 극장을 지었다. 그리고 강남역 일대에 동아극장을 짓기 위해 극장 터를 구입했을 뿐이다. 사방에 돈이 될 물건들은 산재했지만 그는 영화 제작에 공을 들였다.

지금도 시내를 오가면 그가 지목하는 몇 개의 부동산이 있다. 당시 구입했으면 했던 물건들인데 그는 결코 후회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술회할 뿐이다. 오히려 갖고 있어야 할 물건들을 팔며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우면산 자락에 자리했던 그의 집은 명당 터였다. 부동산 업자의 권유로 타인에게 넘어갔지만 이 집은 그가 소유하고 동아수출공사 기념관이 들어섰어야 할 곳이었다.

동아수출공사가 제작하는 영화들이 크랭크 인하면 고사를 지내고 홍콩 스타 성룡도 초청해 파티를 개최했던 곳이다. 사연도 많고 동아수출공사의 그 수많은 유물들을 전시하기에 딱 알맞은 공간이지만 이제는 지나간 일일 뿐이다. 작년의 어느 날 이 집을 가보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이 회장은 그날 밤 배 앓이를 하였다고 한다. 후회할 일을 하지 않아야 하지만 그건 인간 능력 밖의 일이다.

그는 연출부를 거쳐 제작부가 들고 오는 지출결의서를 그대로 결재해주었다. 그것은 그가 제작한 영하의 완성도를 보증하는 것이었다. 파티 장면이라면 근사한 파티 장면을 보여준다. 배창호 감독의 <천국의 계단>(1991)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한 빽그라운드로 동아수출공사 영화는 한국영화 100년사에 빛이 난다.

배창호 감독의 <황진이>(1986) 촬영 때에는 동시녹음을 위하여 외국에서 거액의 임차료를 물며 동시녹음을 위한 미첼 카메라를 임대하여 영상미 최고의 영화를 만들어 냈다. 다른 영화사라고 그리하지 말란 법은 없는데 그의 집중 투자는 주변을 긴장케 했다. 합동영화사의 곽 사장이 했던 인사가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였다고 한다. 당시 저예산 영화가 만들어지던 시절의 일이다. 그가 투자ㅣ를 아끼지 않았던 것은 그가 영화 제작을 시작했을 때의 신념인 일본영화를 능가하자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시녹음의 선구자인 우진 필름의 정진우 감독도 이미 기술 투자를 먼저 시도했었다. 정진우 감독으로 인해 한국영화계는 진일보하였고 이우석 회장 역시 그를 타산지석 삼아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깊고 푸른 밤>(1985)으로 작품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의 평생의 꿈을 실현한 일이다.

<소림사 18동인> 등의 대만영화를 수입해 소림사 시리즈를 알린 것도 그이다. <미워도 다시한번> 시리즈를 대만에 수출해 대만의 영화 중계인 고인하 씨 좋은 일도 시켜주었다. 험악한 영화계에서 70년간 일하며 싸움 한번 없었으니 그는 매사에 양보하며 싫은 소리 한 번 안했기 때문이다. "원도 한도 없이 살았다."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하는 말이다.

그는 해마다 원로영화인 송년회를 전액 후원한다.영화인들 때문에 오늘의 동아수출공사가 있었고 자신이 존재하므로 그것을 돌려준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을 실천한다는 정신이다. 많은 영화사들이 있었지만 분명한 건 그만이 그와 같은 정신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영화계에 재벌인 신영균 회장이 많은 기부를 하며 사회에 재산을 환원하고 있다. 이런 어른들이 한국영화계에 있음으로 해서 더욱 이름다운 역사를 남기고 밝은 미래를 향해 발전해나갈 것이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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