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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이준구 그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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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이준구 그랜마스터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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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16민족상 시상식에서
▲ 2007년 5‧16민족상 시상식에서

2000년대 이후 미국으로 국제전화를 드려 인사는 했었지만 처음 뵌 건 2007년 516민족상 시상식에서이다. 그후 한국에 오실 때 마다 찾아뵙고 정담을 나누었었다. 그의 특강은 물론 인터뷰 및 EBS라디오 출연, 제33회 초청세미나까지 기억이 새롭다.

2013년 8월 25일 1시부터 한국영화100년사 세미나로 수원대 영화학과의 김석범 교수가 “영화 프로듀서의 일”을 주제로 발제를 하였다. 영화 프로듀서는 영화기획자로서 제작투자도 담당하기에 영화제작상 가장 중요한 자리이며 책임자이기도 하다. 그가 기획한 유준상 주연의 영화 <터치>는 2억 원을 투자했는데 독립영화로서 개봉 상 불이익을 받아 민병훈 감독은 고스란히 손해를 감수했다고 한다.

이어서 시작된 이소룡기념사업회 세미나는 회를 거듭하며 해외에서까지 찾아오는 방문자가 생겼다. 오늘 해외방문자는 일본인 아가씨 두 명이다. 자칭 당룡과 이소룡의 팬이라며 오늘의 초청자인 이준구 태권그랜마스터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이준구 그랜마스터는 미국에 처음으로 태권도를 전파한 태권도의 대부이며 알려졌다시피 이소룡에게 태권도 발차기를 전수한 장본인이다. 원래 쿵후에는 앞차기밖에 없었는데 그가 여러 발차기 기술을 전수했고 이소룡은 그것을 스크린에서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이소룡은 그런 그를 스승처럼 생각했는데 홍콩의 구두가게 주인도 알아보고 깍듯이 했다고 한다.

이준구 그랜마스터는 태권도 10단으로 2007년 태권도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준리태권도협회 의장이다. 그는 세계무술협회를 창설했고 세계 트루토피아 모범실천운동을 전개하며 국제10021클럽 총재로 있다. 10021클럽은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이 총재가 벌이는 정신운동이다.

그는 1931년 충남 아산생이며 수원에서 성장하고 서울의 동성고를 졸업하고 동국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13세 때인 1947년 청도관에서 당수도를 익혔다. 태권도란 이름이 명명되기 이전이다. 당수도를 하게 된 이유는 순덕(?)이란 여학생 때문인데 얻어맞고 와서 어머니에게 혼나고서이다. 태권도는 그의 인생에서 운명적인 것으로 그러한 일이 아니더라도 그는 태권도를 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뒷풀이에서 들었다.)

그가 대학 1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미군 통역, 하우스보이 등을 거쳐 군에 입대 사관후보생 교육 중 휴전이 되었다. 그는 1956년 6월 1일 군인의 신분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 12월에 귀국하였다. 이미 그는 본격적인 미국유학을 꿈꿨다. 1957년 유학시험에 합격하여 9월에 제대하여 11월 21일 정식 유학생 자격으로 도미한다. 1958년 2월 스프링 세메스터 입학하여 텍사스 주립대 토목공학과에서 수학하였는데 4학년 때인 1962년 워싱턴으로 와서 코리언가라테(태권도)도장을 오픈하는 바람에 12학점을 미수료하여 텍사스 주립대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세미나가 거듭되며 중량감 있는 초청자가 늘고 있지만 오늘 초청자는 우리 세미나 사상 최고 원로이며 이소룡과 흉금을 터놓고 지낸 몇 안 되는 벗이다. 한국인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이소룡과 친밀하여 이소룡에 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다.

이소룡과는 1964년 8월 2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에서 개최한 국제가라테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이소룡은 23세였고 이준구 관장은 32세였다. 이후 두 사람은 무술을 논하고 배우며 가장 가까운 벗으로 지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고간 19통의 편지사연을 소개한 『브루스 리와 나』라는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는 이소룡에게 태권도 발차기를 전수한 것뿐만이 아니라 권투 세계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에게 애큐펀치(짧은 거리에서 보다 효과적이며 근접전에서 유효한 펀치기술)를 전수했다. 이소룡의 사후인 1975년에는 무하마드 알리가 일본의 유명레슬러인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세기의 대결에 대비하기 위해 이준구를 찾았다고 한다. 알리의 집으로 찾아가 3년간 지도를 했는데 그전까지 복싱에서는 팔을 길게 뻗은 상태에서 거리를 확보하는 접근전 방식이었는데 이준구는 최대한 몸 쪽으로 당겨 주먹이 나가는 시간을 최소화 시켰고 알리는 그를 통해 격투기로써 태권도의 여러 장점을 익혔다.

이소룡에 관한 나의 질문은 그동안 궁금한 여러 가지가 쏟아졌는데 그 말고 이런 질문에 답해줄 사람은 흔치 않다. 아마도 당시에는 그가 유일할 수도 있다. 이소룡에게 충고했던 이야기며 성격, 171cm 혹은 174cm로 알려진 키의 진실, 이소룡은 취미생활이라고는 독서뿐인 외골수였는데 각종 무술서적을 독파하며 책 수집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준구에게도 태권도 책을 부탁했었다고 한다.

절권도에는 필연 태권도의 여러 기술이 담겨있다. 그 외 <그린호넷> 출연 이후 각종 대회에서의 에피소드, 도미니카 공화국 TV출연 에피소드 등이 공식석상에서 이야기되었고 뒤풀이에서는 이소룡의 사인 및 어른으로서 충고했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모든 내용들은 일반인들로서는 첨 듣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소룡은 9살 연하이기는 하지만 서로 간에 존중하는 마음으로 우정을 이어왔고 특히 송판 격파를 배우자마자 본인이 석 장을 깼는데 이소룡이 넉 장을 격파했다며 이소룡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소룡과 같은 길을 걸어온 그는 살아있는 이소룡 같기만 하다. 나로선 이소룡이 살아있었다면 지금 그처럼 정신개혁 운동을 펼치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살아있는 전설로 33회 세미나는 그의 존재감만으로도 너무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별세하였다. 오래전부터 뵌 것 같은 정을 주셨던 이준구 그랜마스터의 추모식이다. 나로선 빠질 수가 없었고 일정을 조정하여 참석하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분당 서현역을 출발한 차는 서행을 하며 3시간 반 만에 무주 태권도원에 도착하였다. 추모식의 주빈은 국제지도자연합의 김학수 세계총제와 땡큐10021국제문화재단의 김성걸 이사장이었다.

무주 태권도원에서 이준구 그랜마스터의 추모식
▲ 무주 태권도원에서 이준구 그랜마스터의 추모식

그리고 미국에서 이준구 그랜마스터의 영결식이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조문자들과 마지막 고별예배가 미국 현지시간 5월 8일 11시에 버지니아 매클린 바이블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한국에서는 땡큐10021국제문화재단의 김영걸 회장이 참석했다. 이소룡의 미망인 린다 캐드웰도 참석했다.

故 이준구 대사범님의 영결식 사진
▲ 故 이준구 대사범님의 영결식 사진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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