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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유병용 그랜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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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유병용 그랜마스터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4.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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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2월, LA에서 가장 큰 유병용(오른쪽)의 체육관에서 필자(왼쪽)의 이소룡 평전을 기증했다.  
▲ 2015년 2월, LA에서 가장 큰 유병용(오른쪽)의 체육관에서 필자(왼쪽)의 이소룡 평전을 기증했다.  

유병용은 이소룡의 팬들이라면 익히 알고있는 이소룡 무술 완성에 일조한 태권도 그랜마스터이다. 무덕관 시절부터 운동을 했던 그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그러나 영어 실력 때문에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고 눈물겨운 유학생활 끝에 석, 박사 학위까지 받아내었다. 그에 대한 후배들의 존경심은 최고이다. 그는 유학으로 익힌 최고급 영어를 구사하며 인간미 또한 최고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유학하며 학창시절부터 태권도를 전파한 그는 교내로 찾아온 이소룡과 처음 만났는데 그후 교류가 계속되었고 오늘날 태권도장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인 중에서 가장 많은 시합에 나가 가장 많은 우승을 한 그는 타고난 무술인이지만 시작은 신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거구의 그랜마스터 말로는 믿기지 않지만 그는 병약했고 죽음 직전까지 갔으나 태권도를 익히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후 태권도를 계속하며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50불만 갖고 온 그는 초창기 무숙자로 갖은 고생을 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전정신으로 모든 역경을 헤쳐내고 미 주류사회에 진입하게 되고 미 메이저 영화사 부사장을 역임하는 등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 팔순을 넘긴 그는 지금도 워너브라더스 입구에 천여 평의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운영 정도가 아닌 지금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며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 내가 본 체육관 중 최대 규모인데 총 2층으로 1층이 웨이트 트레이닝장이고 2층은 에어로빅 트레이닝장, 태권도장, 그리고 자신의 오피스와 개인 극장이 있다.

정창화 감독의 홍콩영화 <염굴신탐(한국제목: 흑무사)>에 출연했으며 워너브라더스 부사장을 역임한 그는 한국무술인 중 가장 출세(?)하였다. 운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만큼 노력을 했다는 반증인데 그와의 인터뷰에는 큰 울림이 있었다.

이소룡의 데뷔에 얽힌 비화를 알고 있는 그는 이소룡이 유명인이고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가르쳤다는 말은 조심스럽다며 말을 시작했다. 쇼브라더스 기획실장 시절부터 알고 지낸 레이몬드 초우가 처음 자신에게 출연의뢰를 하였지만 이소룡을 대신 추천했다고 한다. 이소룡은 자신의 무술을 배웠고 엷은 갈색의 머리를 가진 동서양의 혼혈인으로 재능을 겸비했기에 추천했다고 한다.

그 후 이소룡 타계 후 제작 중단된 이소룡 영화 <사망적유희>에 대역으로 출연 부탁을 받아 홍콩으로 갔으나 자신은 대역을 할 수가 없어 정창화 감독의 <염굴신탐>에 출연하게 된다. 이 영화를 8개월에 걸쳐 촬영하였으나 자신이 배우로는 적합치 않다는 생각을 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귀국 후 그는 워너브라더스 영화 제작에 손을 대어 18편에 소액 투자하게 된다. 18편은 <밤의 열기속으로>, <더티해리>, <타운인포러>, <디어헌터> ,<프랜치코넥션>, <사랑과 영혼>, <플래시댄스>, <다이하드> 등이며 이 영화에 투자, 기획프로듀서 활동 후 워너브라더스 부사장에 올랐다.

영화사는 여러 기획자의 영화 및 자체 제작영화를 제작 후 배급을 하여 수입을 20% 내외에서 나누게 되는데 자신은 액션영화 위주로 투자를 하였다고 한다. 그후 MGM 부사장을 7년간 역임하고 다시 워너브라더스에서 8년간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현지에서는 그는 닥터 유, 혹은 마스터 유로 통하는데 그는 미국사람들도 놀랄 경력이다. 마스터는 무술 전문가로서 불리우는 것이고 교육자로서의 닥터 유는 똑똑해야 했다며 유태인과 경쟁하여 36년간 견디어냈다는 것 만해도 감사한 일이라고 한다. 후배양성을 못했다는 회한은 있지만 한국인들은 참을성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중국인들은 미래를 보며 살고 일본인은 어부의 마음으로 진흙처럼 뭉쳐 사는데 그들은 체면을 버리고 노력하는 일체감이 있는데 비해 한국인은 사냥꾼이라는 특성이 있어 항상 1등을 추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인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이유로 후배양성에 힘들었다고 한다.

그는 성룡의 미국 데뷔에 나섰고 오우삼 등을 미국영화에 데뷔시켰다고 한다. 스스로가 동양인이기 때문이었는데 동양인(발언의 맥락상 한국인을 조심스럽게 표현한 듯)들은 참고 견디어 내지 못해 기름과 같이 겉도는 사람들이 많아 성공을 못하고 비주류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1년에 6밀리언 달라의 연봉을 받았지만 2006년 이후 영화사업에서 손을 떼었다고 한다. 자신은 특별한 미래계획이 없는데 다만 후배양성에 노력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영화 발전에 희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인생의 철학으로는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며 흐르는 물은 썩지 않듯이 늘 도전정신으로 살고 타인을 비난하지 않고 늘 배우려는 학생의 마음으로 나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 자신을 채찍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정리하였다.

자신의 스승은 좋은 것을 가르쳤고 친구들은 훌륭한 것을 전해주고 제자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었는데 쉼 없이 노력하는 도전하는 정신으로 나를 이기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했다. 또 스스로를 채찍질할 수 있는 스승과 제자, 벗으로 홀로 서야 하며 비굴하거나 거만하지 말고 노력하되 고통을 두려워 말라고 당부했다.

스스로를 태워 주변을 밝히는 촛불이 되라는 맺음말은 진정 그가 인생의 마스터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했다. 너무나 놀라운 그의 프로필을 보며 의구심과 함께 한번은 의심까지 하게 되는데 그에 대한 검증은 이미 출간된 그의 저서 『인사이드 유』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유병용의 젊은 시절 사진
▲ 유병용의 젊은 시절 사진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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