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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와 촬영감독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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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와 촬영감독 ②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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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춤 살풀이'에 출연한 한영숙 명인
▲ '한국의 춤 살풀이'에 출연한 한영숙 명인

이 칼럼을 쓰면서 보니 참으로 다양한 소재의 독립영화를 만들었다. 다큐멘터리, 심리극, 액션극, 사회고발 영화, 무술영화, 키네스타시스 영화, 뮤직비디오, 영상 포엠까지 참으로 다양한 시도였다.

그 때 쯤 나도 "영화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며 극영화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당시만 해도 조감독 10년은 감독 데뷔의 기본이었다. 그런 관례를 깬 것이 배창호 감독이고 이에 고무된 젊은 감독들은 개인 프로듀서들과 손을 잡고 하나 둘씩 데뷔를 하였다.

나도 안태완 촬영감독의 소개를 받아 원작소설 영화화를 추진하였다. 바로 사회파 소설 <바람의 아들>인데 이것도 필름 값을 보태라는 제의에 그만 물 건너갔다. 그렇게 해서 영화가 만들어진들 광고나 제대로 되겠나 싶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언젠가 할 수 있다는 배짱도 생겼다.

연출부 생활을 하며 <한국의 명주(銘酒)> 다큐 시나리오를 써 영화진흥공사에서 상도 받았는데 두 번째 쓴 다큐 시나리오가 바로 <한국의 춤 살풀이>이다. 이미 살풀이춤의 춤사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비교적 영상구성이 쉬었다. 그만큼 살풀이춤은 영상적이다.

<한국의 춤 살풀이> 시나리오도 영화진흥공사에서 영화소재 상을 받았고 영화화 판권도 내가 받아 제작에 착수했다. 우선 주인공은 한국춤을 예쁘게 추기로 유명한 이경화 교수로 정했다. 그녀의 스승으로는 살풀이춤 인간문화재인 고 한영숙 명인으로 결정되었다. 촬영을 맡은 안덕환 촬영감독과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살풀이춤을 보여줄 것인지를 의논하였다.

우리는 이경화 교수에게 설악산 촬영할 것을 하기로 제안했다. 등산을 해본 적이 없다는 이 교수를 설득했는데 그녀는 의외로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대청봉에를 가보겠냐며 의기투합하여 11월 중순에 설악산 산행을 하기로 했다. 서울에서 새벽에 출발해 오색휴게소에서 등반을 시작했는데 오후 1시 경이었을 것이다. 나는 설악산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최단거리의 코스를 탔는데 이 길이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는 길이 됐다.

무거운 촬영장비에 당시엔 최고품인 삼각대까지 짐이 한 가득인데 포터도 없이 올랐다. 거기에 산행초보인 이 교수까지 동반했으니 나의 시간 계산은 맞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쩌랴, 이미 돌아가기에도 너무 멀리 왔다. 우리를 앞서간 마지막 산악인들과 헤어진지도 벌써 오래 전이다.

시간은 벌써 약 네 시간이 지났고 이미 높은 산에도 어둠이 내려 안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조난을 당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나는 뒤처진 일행을 뒤로 하고 힘겹게 오르는데 저만치 중청산장의 작은 불빛이 보였다. 이젠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산장지기와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는데 그야말로 100m 전방이었다. 모두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며 올라왔던 것이다.

산장에 올라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모두가 꿈만 같아 했다. 심지어 누군가 먹다버린 배 껍질까지 봐두었다는 이 교수의 말에 죽음과 생존의 갈림길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산장의 밤은 추웠다. 가지고 옷을 껴입고 양말도 나눠 신은 채 하룻밤을 지새우고 이튿날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팀 모두가 의기충천했는데 촬영은 만만치 않았다. 삭풍에 가까운 바람이 몰아치며 살풀이 수건은 한낱 낙엽처럼 흩날렸다. 촬영을 포기하고 또 하룻밤을 보내고 3일째야 쾌청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지나가던 사진작가는 웬 작품인가 연신 카메라를 들이댔고 살풀이춤은 창공에 어우러졌다. 지나던 비구니 스님까지 찬조출연하며 살풀이춤은 생각했던 이상의 의미를 담고 촬영되었다.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는 않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산길은 계속됐고 우리가 어떻게 이산을 올라왔나 싶었다. 1시경에야 휴게소에 도착했는데 조용필이 선전한 맥콜 1박스를 사서 마셨다. 서울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겁 없이 얘기했는데 동석한 그녀의 남편이나 스태프들 모두 그것을 이상하게 듣지 않았다. 그것은 감독이 출연자에게 보내는 최대의 감사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촬영은 초겨울까지 계속되었다. 안덕환 촬영감독과는 최고의 영상을 만들어내고자 모닥불을 지펴가며 그림을 만들었다. 모닥불 너머 촬영된 춤사위도 일품이었다. 다큐 영화는 영화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출연자의 품격도 중요하다. 출연자의 품격이 영화의 완성도를 좌우한다. 그것은 영상을 통해 보여지니 촬영의 중요성은 두말 할 나위 없다.

이 영화는 금관상영화제에 출품되었지만 아쉽게도 수상하지는 못했다. 나로서는 그대로 끝낼 수는 없었고 다음 해에 보충 촬영을 하고 수정하여 <살풀이춤>이란 제목으로 출품해 조명상을 수상했다. 기존 문화영화사들이 상을 독식하던 금관상에서 독립영화로 수상했다는 것으로 의미를 삼았다. 조명상 수상은 밤에 야외에서 불 밝혀 살풀이춤 촬영을 했는데 한복과 춤사위가 조명과 어우러져 수상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최고의 영상미학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다큐를 만들었지만 이 때만 해도 내 인생이 다큐로 풀릴 줄은 아직 몰랐다. 이 영화는 공륜(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은 첫 영화이다. 1986년인데 이 영화가 나의 데뷔작이다. 내가 영화를 만든 지 11년 만이고 학교를 졸업하고는 5년 만의 일이다. 이 영화를 함께 촬영한 안덕환 감독과는 지금도 등산을 하며 우정을 나누고 있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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