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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영화 벗 안태완 촬영감독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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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영화 벗 안태완 촬영감독 ②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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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제7회 금관상영화제에서 '귀항'으로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을 수상한 태평양미디어 심정연 대표, 안태근 감독, 안태완 촬영기사(맨 왼쪽 사진의 순서)
▲ 1990년 제7회 금관상영화제에서 '귀항'으로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을 수상한 태평양미디어 심정연 대표, 안태근 감독, 안태완 촬영기사(맨 왼쪽 사진의 순서)

안태완 촬영기사와 나는 1983년부터 같이 활동했는데 부산동백영화제 수상작인 49재를 다룬 <회심>을 찍었고 1990년에 촬영한 홍보영화 <귀항>으로 그는 금관상 촬영상을 수상하고 나도 감독상을 수상한다.

그는 나의 극영화 감독 데뷔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수시로 내가 운영하던 동보헬스클럽을 찾아와 내가 쓴 시나리오를 읽으며 영상을 아야기했다. 그가 다리를 놓아주기 위해 알아온 영화들은 내게는 영양가가 없는 영화들이었다. 당시 에로티시즘 영화 전성시대를 맞아 야한 영화가 대다수였고 나로서는 응할 수 없는 영화들이었다.

그나마 사회파 장르인 <바람의 아들>은 필름 값 만자 비용을 대라는 터무니없는 조건이었다. 나로서는 영화 전공을 하고 제대로 된 영화를 제 사례 받고 데뷔한다는 각오였다. 그러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고생을 참고 견뎌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대우 받으며 데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사례 문제라기보다는 그렇게 제작된 영화가 광고나 제대로 할까 하는 우려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와의 영화 계속하기는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그대로 여러 영화를 촬영하느라 나와는 더 이상 함께 하질 못했다. 나 역시 35mm 중편영화 <철판을 수놓은 어머니>를 이승언 기사와 함께 촬영했다. 안 기사와 함께 촬영을 하지 않는다고 인연이 끊어지는 건 아니다.

1995년 그의 마지막 영화인 이병주 감독의 <해병묵시록>을 찍고 해병전우회 일을 하다가 공무원 폭행과 관련되어 중국으로 간다. 중국을 택한 이유는 대만시절부터 익힌 중국어 때문일까? 중국으로 갈 때 당시 모 회장이 2천만 원을 지원해주었다는데 전화위복이라 할까? 한때 그는 보따리 무역업을 하며 천진에 아파트 4채를 가진 거부(?)가 되었다. 안 기사의 새 아들은 천진한성방옥신식락순유한공사 사장인데 복잡한 얘기는 생략한다.

“중국이 발전하면 나도 발전한다”라는 그이다. 그만큼 중국에서도 열심히 살았던 그이다. 그가 사는 난텐화일 아파트는 57평인데 나를 위한 집필실로 제공하겠다니 말만 들어도 고맙다. 그는 나를 언제까지나 안 감독이라 부르며 예우를 한다. “안 감독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라는 그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2018년 8월 그와의 마지막 만남에서도 걱정은 온통 나뿐이었다.
▲ 2018년 8월 그와의 마지막 만남에서도 걱정은 온통 나뿐이었다.

그는 “마음이 부자”라며 겸손해한다. 한국영화계가 어려울 때 가장 바쁘게 보낸 그가 중국에서 낚시나 하며 소일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토록 빨리 자리 잡을 것이라고는 미처 몰랐다. 지나고 보니 그라면 해낼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그는 내게 항상 듬직한 형이고 벗이었다. 이름도 비슷하지만 내 옆에서 ‘안 감독!’ 하며 나를 위해주고 지켜주었다.

그가 중국으로 떠난 게 벌써 스무 해가 넘는다. 이제 서울 집을 팔고 아주 간다면서 그는 내게 큰 선물을 하였다. 바로 골동품인데 요즘은 고미술품으로 불린다. 선뜻 이 비싼 선물을 하는 것은 바로 3년 전의 약속 때문이란다. 그 때부터 주려했는데 오랜만에 귀국했다며 그 약속을 실천한 것이었다. 굳이 꼭 주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나를 감동시킨다. 언제나 빙긋이 웃으며 나를 이해해주는 그는 영원한 친구이며 형이다.

또 한 번은 중국에서 그가 보낸 카드의 사연이 나를 감동시켰다. “고국에 있는 안 감독님을...” 하며 시작되는 글은 결코 가식이 없는 그의 마음을 담았다. 그토록 보고 싶다며 카드에 사연을 적었는데 울컥하며 울 뻔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오고 싶었으면 이런 사연의 카드를 보냈을까? 당장이라도 달려가 얼싸안고 싶은 마음이었다.

떨어져 있지만 항상 생각을 하였는데 그에게서 2018년 3월에 9년 만에 만나 등산을 함께 하고 8월에 갑자기 연락이 왔다. 말복으로 뜨거운 날 그가 예전에 살던 신림동에서 만났다. 이제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데 베트남전 후유증으로 고엽제 환자가 되어 투병 중이었다. 그래도 화제는 영화였고 그는 영원한 영화인이었다. 이후 그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전화번호도 바뀌었고 어디서도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다.

2018년 3월의 안태완 기사, 이때만 해도 괜찮아 보였다.
▲ 2018년 3월의 안태완 기사, 이때만 해도 괜찮아 보였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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