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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구중모 촬영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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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구중모 촬영감독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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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중모 촬영감독(오른쪽)
▲ 구중모 촬영감독(오른쪽)

구중모 감독은 1943년 6월 서울생이다. 한영중고를 거쳐 서라벌대학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1963년부터 김강위, 한상원, 이문맥, 정광석 기사의 촬영부를 거쳐 1970년에 기사 입봉하여 장일호 감독의 <빨간 마스크의 여인>(1971)으로 데뷔했다.

그는 데뷔 초기에 이두용 감독의 <날벼락>, 김선경 감독의 <흑룡강>, <밀명객>, <빌리장>, <흑룡>, <금호문>, <무림대협>, <각시탈>, 박노식 감독의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방범대원용팔이> 등의 액션영화를 촬영했다.

김선경, 조지 비에이라 공동감독의 합작영화 <추적자>(1979) 제작 차 우리나라를 찾은 미국 스태프들은 한국의 후시녹음 형태를 보고 합작은 불가능하다며 철수를 하였다. 주인공인 크리스 미첨까지 철수했다. 그는 촬영마저 접을 순 없어 그 때 촬영감독을 설득하여 선진 촬영을 배우며 촬영을 마무리했다. 당시 주인공이 빠진 상태라 대역을 써서 완성했을 터인데 시나리오를 바꾸는 것으로 결정하여 촬영을 마무리했다고 한다.

극장에서 개봉되었을 때 나도 보았지만 완성도가 떨어지는 이상한 영화가 되었다. 그것이 당시 한국영화계의 현주소다. 합작 상대국의 스태프들까지도 포기하고 돌아섰던 그 상황에서 한국영화는 만들어졌고 오늘날 세계 영화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그에게 촬영의 눈을 뜨게 해준 건 김기영 감독의 <흙> 때였다. 이후 임권택 감독의 <짝코>, <씨받이>, <티켓>, <아제아제바라아제>, 이장호 감독의 <명자 아끼꼬 쏘냐>, 그리고 1996년 <용병이반>까지 30여 명의 감독을 거치며 활동하였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대종상은 물론이고 국제영화제 수상작들이 즐비하고 한국영화사의 대표작들을 촬영하였다. 그만큼 그의 실력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는 영원한 현역 촬영감독으로 지금도 시나리오를 보며 기획을 하고 있다. 제작이 안 되어 아쉬워하는 영화는 신도 가네토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고도>라는 영화로 경주를 배경으로 한 쌍둥이의 이야기다.

그의 앨범을 보면 1970년대 이후 당시의 광기와 열정을 볼 수 있는 사진들이다. 신상옥, 임권택, 최하원, 이장호, 강민호, 테렌스 영, 김의석 감독을 비롯하여 김지미, 박노식, 신성일, 강수연, 이낙훈, 재클린 비젯, 크리스 미첨, 나영희, 이보희 배우 그리고 차정남 조명감독, 임학명 조수 등 한국영화사의 증인들의 면면을 보며 한국영화사의 몇 페이지가 지나간다.

당시는 정말 광기의 시대였다. 영화가 좋아 열악한 환경에서 미친 듯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이 정말 어울리는 표현이다. 감독이나 조수나 모두가 어렵게 살았고 그것이 천직이라는 믿음으로 버텨내던 시절이다. 그의 사진첩을 보면 많은 분들이 별세하였다. 구중모 촬영감독은 그 중심에 서있었던 한국영화사의 산증인으로서 그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를 2019년 6월 16일, 제74회 한국영화100년사 세미나에 모셔 상영작 <씨받이>를 보고 많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었다.

그는 동시녹음 영화에 최적화된 촬영감독인 것이 <추적자>를 통해 경험을 했으며 테렌스 영 감독의 <오, 인천!(Oh, Inchon!)>(1982)까지 참여했던 베테랑이기 때문이다. <오, 인천!>은 일본의 사카구치 마츠사부로와 통일교의 문선명 총재가 제작한 영화로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테렌스 영 감독의 작품이다.

<007> 시리즈로 유명한 테렌스 영 감독이 1978년 5월부터 촬영을 하여 제작에 5년이 걸렸다. 모프신 촬영에 무려 카메라가 9대 이상 동원되었고 마지막 카메라를 구중모 기사가 잡았다. 출연진으로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인공 맥아더 장군 역을 맡았고 중앙대 양광남 교수가 이승만 대통령 역을 맡았다.

5년간 촬영한 것은 여러 악재가 겹쳤기 때문인데 촬영용 등대가 태풍에 무너지고 시행착오로 인천상륙작전이나 맥아더가 등장하는 군중신이 어색하여 재촬영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로렌스 올리비에가 통일교를 너무 홍보한다며 촬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일당 개념으로 개런티를 받아 촬영을 마쳤는데 당시 이 영화에 투입된 모든 스태프도 일당 개념으로 사례를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스턴트맨들은 강에 뛰어들 때마다 계산을 해주므로 열심히 일했다고 추억한다. 당시 스턴트맨으로 참여한 문종금 배우의 증언에 의하면 월급으로 3백만 원을 받았고 스턴트 건당 30만 원을 추가로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제작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완성하고 보니 4,410만 불이 투입된 120분 길이의 전쟁대작이지만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악의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제작사는 칸 국제영화제의 혹평으로 120분의 영화를 105분으로 편집해서 개봉했으나 흥행은 크게 실패했다. 결국 제작비의 반 정도 밖에 수입을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지 못한 것은 미개봉 되기도 했지만 비디오나 DVD로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의 연기자와 스태프가 참여한 협작 형태였다. 모든 주요 스태프가 미국에서 왔고 한국 스태프의 지원 아래 촬영된 형태다. 통역으로 영어가 가능한 이성구 감독이 현장에서 한국인 스태프들과 엑스트라를 지도했다. 한국인이 출연하고 한국을 배경으로 촬영할 때 한국인들을 통솔하기 위한 한국인 조감독이 필요하므로 협업제작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일제강점기 한국인을 주요 대상으로 한 영화 제작에서 이미 적용된 제작 형태이다.

구중모 촬영감독의 <명자 아키꼬 소냐> 역시 지미필름이 사운을 걸고 제작한 초대작이다. 당시 한 대도 쓰기 어려운 미첼 카메라를 두 대나 동원해 러시아 로케이션을 하였다. 이장호 감독으로서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을 것인데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고 수출까지 안 되었다. 지미필름은 휘청했고 결국 폐업한다.

이장호 감독으로서도 위기였다. 영화 한 편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 채 장밋빛 희망은 예상치 못한 결과로 나타났다. 당시 최고 성능의 카메라 앞에 섰던 구중모 촬영감독은 두고두고 원인 분석을 했다. 그리고 어느 회고전에서 함께 이 영화를 시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지금 4D 입체영화 제작을 구상 중이다.

▲ 김선경, 조지 비에이라 감독의 '추적자'는 많은 것을 배웠던 현장이다. 왼쪽 두번때 카메라를 앞에 두고 있는 이가 구중모 촬영감독이다.
▲ 김선경, 조지 비에이라 감독의 '추적자'는 많은 것을 배웠던 현장이다. 왼쪽 두번때 카메라를 앞에 두고 있는 이가 구중모 촬영감독이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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