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8 20:00 (일)
[안태근의 다큐세상] 글로벌스타 이소룡
상태바
[안태근의 다큐세상] 글로벌스타 이소룡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4.0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소룡의 하드 캐리(hard carry)를 보여준 1971년 나유 감독의 '당산대형'
▲ 이소룡의 하드 캐리(hard carry)를 보여준 1971년 나유 감독의 '당산대형'

나와 이소룡은 어쩌다 만난 분이 아니고 인연이 확실한 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세미나를 13년 간 매달 해올 수가 없다. 2010년 11월 한국영상자료원 극장을 대관하여 첫 세미나를 한 이래 2022년 12월까지 143회를 개최했다. 지금 같으면 꿈도 못 꿀 텐데 그 일을 해낸 것이다. 그래서 감히 인연이라는 말을 쓴다.

그를 생전에 만난 일은 없고 그의 사후 일주일 만에 개봉된 <정무문>을 통해 그를 처음 스크린을 통해 만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0년 『이소룡 평전』이 푸른나무 출판사와 계약이 성사된다. 다른 출판사와의 계약이 안 되었는데 의외로 바로 통장에 100만 원이 입금이 되었다.

나는 이 돈을 의미 있게 써보자고 그의 탄생 70주년인 2010년 11월 27일, 한국영상자료원의 제3관을 종일 대관하였다. 그리고 <맹룡과강>, <사망유희> 등 그의 영화 두 편을 보았고 <사망유희>에서 이소룡 대역을 맡았던 당룡을 불러 관객과의 대화를 갖고 저녁식사까지 제공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소룡 세미나가 매달 한 번씩 개최되어 143회에 이른 것이다. 코로나가 시작되어 극장 대관이 불허되자 그만 둘 기회였지만 나는 줌(Zoom) 플랫폼을 이용해 비대면 세미나로 계속해나갔다.

세미나를 접겠다고 생각한 것은 50회, 100회에도 있었지만 결국 143회로 마감했다. 이유는 작년 5월에 고인이 된 신일룡 형이 “이소룡이 친척이라도 돼냐?”고 추궁하며 일을 줄이라고 충고했다. 울고 싶은 차에 뺨 맞은 격이었다. 일이란 것이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인데 어떻게 끝낼지를 궁리하던 끝에 타인으로부터 끝내라는 말을 들으니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나저나 신일룡 형과도 친척이 아닌 나는 그의 평전을 집필했고 곧 출간 예정이다.

이소룡 세미나에 대해서는 별도로 소개할 예정인데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길래 그의 세미나를 매달 한 번씩 13년간 이어왔는지 행사를 주최하고 주관해온 나로서도 궁금할 뿐이다. 다만 그로 인해 많은 좋은 분들을 만났기에 그의 가호가 분명하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사부라고 부른다. 이소룡은 내 인생에 분명한 좌표가 되어준 분이다.

이소룡 세미나는 잠정적으로 끝났지만 아직도 ‘부르스리데이’ 행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의 영화 <정무문>이 한국에 개봉된 1973년 7월 27일을 기념해 해마다 2010년부터 모여 그를 기리는 행사이다. 2022년에 벌써 13회를 맞았다. 미국의 부르스리 재단의 이사장인 이소룡의 따님인 쉐넌 리가 이를 안다면 비행기 타고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이소룡은 1940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출생이다. 배우인 그의 부친이 미국 순회공연 중 그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홍콩으로 와서 청소년 시기를 보내며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1959년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금수저가 아니라 단 돈 100불만 갖고 유학을 떠났다. 이렇듯 고생을 각오한 일이다.

이소룡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워싱톤 주립대(Washington State University)를 다녔다. 대학을 중퇴하고 일거리를 찾아 도장을 만들고 스타들의 개인교습을 하였지만 가난을 벗어난 건 아니다. 이소룡은 안경테를 수리해 사용할 정도로 가난과 싸웠다. 이렇듯 처음부터 잘 나간 것은 아니다.

게다가 잦은 부상과 척추의 큰 부상으로 의사에게서 다시는 운동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불굴의 의지로 딛고 일어선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서 홍콩에서 활동할 것을 조언하자 홍콩으로 귀국한다.

그렇게 준비된 배우로서 모든 것을 갖추고 쇼브라더스를 찾아갔지만 런런쇼 사장의 퇴자를 맞는다. 그리 미국으로 돌아가서 드라마에 출연하며 명성을 쌓아갔다. 그렇다고 유명한 것은 아니고 단지 동양인 무술배우 한 명이 등장했다 정도였다. 당시 유색인종이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조차도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준비된 자에게는 기회가 찾아온다. 쇼브라더스를 탈퇴하여 골든하베스트 영화사를 설립한 레이몬드 초우가 유량화라는 여배우를 보내 두 편의 영화를 계약하게 된다. 그리고 태국으로 가서 <당산대형>에 출연한다. 시나리오는 특별할 것도 없는 내용,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형편없던 기자재와 무술팀, 그러나 이소룡은 해내고 말았다. 자신이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이며 새로운 무술영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야말로 하드 캐리를 보여준 것이다.

그 영화는 홍콩영화의 흥행기록을 경신했다. 이게 시작이다. 세계 쿵푸영화 역사는 그에 의해 새로이 쓰였다. 개척자적인 그의 삶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청소년기의 사내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남자들의 로망이 되기에 충분하다. 결국 나는 그에 대한 연구와 글쓰기를 거듭했고 2014년 2월에 대망의 『이소룡 평전』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이 책은 저작권 문제로 1,000권 한정판으로 출판되었다.

나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의 세미나를 진행하며 구로도서관 등 각 곳에서 의뢰된 행사를 가졌다. 각종 언론에서의 인터뷰는 물론이고 각 지면에 소개되며 이소룡 문화현상을 소개했다. 호남대 교수로 재직하며 교내에서 ‘이소룡연구회’를 통해 연구보고서를 만들었다. 그 투자 제안서를 갖고 중국에 가서 투자 유치 설명회도 가졌다.

이소룡은 타계하였지만 그의 영향은 아직도 유효하며 그 문화현상은 OSMU(one source multi-use)로 다양한 상품이 개발되며 문화콘텐츠 전공자인 나로서는 그를 알리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비록 기념관 설립은 중도에 중단되었지만 한중간의 외교문제가 풀리기를 기원하고 있다. 내게 이소룡 알리기 사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유효한 사업이다. 이것이 꼭 친척이어야 하는 일이겠는가?

2017년 잠실의 롯데타워에서 제8회 브루스리데이 행사를 갖고 영화제 및 전시회를 개최했다.
▲ 2017년 잠실의 롯데타워에서 제8회 브루스리데이 행사를 갖고 영화제 및 전시회를 개최했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