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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와 촬영감독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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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와 촬영감독 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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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항'을 촬영하는 안태완 촬영감독
▲ '귀항'을 촬영하는 안태완 촬영감독

나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어마어마한 작품명이 나온다. 무려 천여 편을 넘게 만들었으니 얼마나 많은 촬영감독과 함께 했을까? 물론 스튜디오 촬영도 기억나지만 역시 야외 촬영을 함께 했던 이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1:1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일했던 실과 바늘 같았던 사이이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워크숍 제작 촬영을 나갔던 광나루의 모래사장은 잊히지 않는 곳이다. 학우 정태원이 연출하는 제목도 잊힌 실험영화였다. 지금이야 자취도 없이 사라졌지만 온몸을 밧줄에 묶인 여성이 모래사장을 뛰어오는 첫 장면은 끝없는 NG로 이어졌다. “레디 고!” 소리가 연거푸 계속되며 우리는 준비해간 필름을 몽땅 사용하고 말았다. 촬영을 맡은 이는 조교 선배인데 그의 잘못만도 아니고 희한한 일이었다.

영화는 결국 <N‧G>란 타이틀로 소극장에서 상영되었고 모인 학생관객들은 박수로 화답해주었다. 연출도 그러하겠지만 촬영은 우리로서는 난공불락의 기술이라는 것을 실감케 하였다. 나의 첫 영화 <폭류>를 청계천 변에서 촬영하였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촬영은 심오한 예술이다. 우리는 촬영 수업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학창시절 단편영화를 촬영하며 가끔은 직접 카메라를 잡았다. 배우들의 연기지도며 연출도 힘든데 촬영까지 하기에는 버거운 일이고 도와줄 이가 없을 때만 임시방편으로 카메라를 잡았다. 한국청소년 영화제에서 상금으로 마련한 보렉스 카메라를 마련하며 나는 수시로 직접 촬영을 했다. 다큐멘터리이기에 가능한 일인데 조수 없이 다니다가 카메라 몸체(Body)를 도난 맞는 일까지 겪고는 혼자 촬영 나가는 일을 그만 두었다.

방송사로 가며 2000년대에 VJ교육을 받고 카메라를 잡는 일이 많아졌다. 두 대의 카메라를 운용하며 아예 6mm 카메라 한 대를 내가 직접 운용했다.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보는 세상은 감독의 이미지를 응축한 공간이다. 그 사각의 프레임에 목숨을 거는 것이 바로 감독이며 촬영감독이다.

촬영은 체력 소모가 많은 일이다. 카메라 감독은 중노동의 직업으로 집중력과 판단력이 좋아야 한다.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하고 심미안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져야 해낼 수 있는 직업이다. 많은 이들이 젊어서 쉽데 입문하지만 갖가지 직업병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위험에 노출되는 1순위이고 예전에는 주행 장면을 촬영하다가 차에 치이는 사고가 있기도 했다.

감독의 주문을 해내고 온갖 환경에서도 뚝심 있게 버티는 강단이 필요하다. 먼저 떠오르는 이는 역시 안태완 기사(1980년대 당시 호칭이다.)이다. 우락부락한 해병전우회 회원인데 월남전 때 파병되어 고엽제 환자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배우를 해도 될 정도로 터프한데 흡사 터프 가이 현길수 배우 풍이다.

다음은 한 겨울 인천 앞바다에서 군함의 호위를 받으며 삭풍과 마주했던 <귀항> 때의 에피소드이다. 카메라 두 대로 촬영하였으며 액션 장면이 많았다. 물에 빠진 배우들은 물론이고 감독을 맡은 나나 모두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촬영이 끝나나 하는 스태프들의 말없는 시선과 마주하며 무사히 힘든 촬영을 마쳤다.

그렇게 촬영을 마치고 귀항하던 때 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었다. 나는 선장실에서 카메라 감독을 찾았는데 그는 이미 갑판위에서 촬영 중이었다. 그래서 선배는 대단하고 촬영감독은 사물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있어야 가능한 직업이다. 그는 이미 석양 노을을 염두에 두고 나온 듯했다. 영화 촬영은 계획되지 않으면 타이밍을 놓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안태완 기사와는 내가 제작을 했던 단편영화 <회심>과 상공부 제작의 <귀항> 등의 영화를 함께 했다. <귀항>으로 금관상 영화제에서 촬영상을 받았으니 그는 그 이후로 나이 고하를 떠나 내게 꼬박꼬박 “안 감독님”이라 불렀다. 그런 그가 나를 극영화 감독 입봉 시켜주겠다고 무던히도 애썼다.

그런데 그가 물어오는(?) 일들은 대개가 나와 거리감이 있는 일들이었다. “데뷔 시켜줄 테니 필름 만 자만 대라.”는 말이 내게 통할 리 없다. 당시 군소 보따리 영화제작자들이 유명 영화사의 양해 아래 저예산 영화를 대명 제작하던 시절이다. 나의 데뷔작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은퇴 후 중국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했다. 그러더니 아예 중국에 자리를 잡았고 해마다 연하장을 보내주었다. 몇 년 만에 귀국하여 연락을 주어 등산을 함께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다시 소식 두절이다. 그러나 타고난 생존 본능으로 이국땅이지만 잘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단편영화 시절 같이 했던 분들로는 재학생 때 정태원, 김수용, 이경수 학우들이다. 졸업 후 영상 계통에서 종사했는데 역시 학생 때부터 두각을 보였다. 졸업 후에는 안덕환 촬영감독과 더불어 몇 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그는 당시 국군홍보관리소를 퇴직했던 무렵인데 현대방송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함께 했다.

그와 나의 영화 데뷔작 <한국의 춤 살풀이>를 촬영했다. 설악산 대청봉으로 촬영을 갔던 일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공룡능선을 배경으로 ‘살풀이춤’ 춤을 찍고자 의기투합했었다. 그리고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오로지 영상 하나를 건지고자 대청봉을 올랐으니 보통의 근성이 아닐 수 없었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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