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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의 문학 칼럼] 동학농민혁명사상의 현대사적인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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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의 문학 칼럼] 동학농민혁명사상의 현대사적인 의의
  • 한봉수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3.2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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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3월20일 동학농민군 무장현 당산마을에서 기포 130주년일 기념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고 우리 삶의 이정표가 된다. 이이화 역사학자는 <동학농민혁명사>를 집필하며 “역사는 기억해야 살아 있는 유산이 된다. 기억하지 않으면 미래의 교훈으로 삼을 근거를 잃어버리게 된다.”라고 말했다. 필자는 그의 저서를 인용하며 서문을 열고자 한다.

“1894년 반봉건·반외세를 외치며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한 민란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평등·인권 등의 가치를 위한 투쟁이자 자주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외침이었다. 봉건제도에는 불평등한 신분제도와 불균형한 토지제도가 바탕에 깔려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신분 차별과 일부 특권층의 토지 소유 및 농업생산의 독점은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였다. 불평등하고 불균형한 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민중 봉기는 역사의 추진 동력이 됐다.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개혁 없이는 평등과 인권을 추구하는 근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 <동학농민혁명사>

동학농민혁명을 “한국 근대사를 밝히는 상징”으로 삼고 “저항적 민주주의 또는 생존적 민족주의”라는 씨앗을 뿌린 인권사적 사건으로 기념하는 데까지 나아가려 한 지식인의 노력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렇다. 동학농민혁명은 3·1혁명,4·19혁명,반독재·반군부 민주항쟁으로 그 정신이 이어져 왔다. 필자는 동학농민혁명의 세가지 관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의를 찾고자 한다.

첫째는 동학이라는 철학과 사상이 한국 현대철학사상의 문을 열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둘째는 구한말 구체적인 공간에서 시간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시대적인 정신을 실천했다는 데에서 의의가 있다. 그래서 한국 뿐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지속적인 영향을 준 혁명이라는 데에 의미가 더하다.

셋째는 그 혁명에서 추구한 “평등, 자유, 민주” 가치가 근대 사회계약론과 상통하며 그 가치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데에 의의가 있겠다.

동학농민혁명은 또한 ‘촛불혁명’의 근원으로서 우리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의 지도를 그려 나가야 한다. 한마디로 민주적 가치를 실천하였던 “근대 시민혁명과 상통“한다. 우리 민족에게는 미래에도 길을 이끄는 이정표가 되리라 믿으며 현대사적인 의의를 논하고자 한다.

◆ 근대철학사상의 효시로서 동학혁명사상

동학이라는 철학과 사상이 한국 현대철학사상의 문을 처음 열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19세기 위태로운 조선에는 홍경래의 난, 평안도 농민전쟁 , 진주란 등 학정에 분노하는 민란이 이어졌다. 동학은 분노를 넘어 새 세상 의지를 표명했다. 농민이 주체로서 시천주 교리를 바탕으로 보국안민과 척왜양창의( 왜놈 양놈)를 외쳤다.

동학농민혁명의 이론 배경을 논하고자 한다.

1) 시천주 교리

“우주의 근원적 존재를 모신 인간”이라는 시천주 사상이 동학의 근본 정신이다.

최제우는 전국을 돌며 삼남 농민봉기를 목격하고 19세기 민란의 시대, 혼돈의 시대에 1860년에 “사람이 한울”이라는 기치로 동학을 창도하였다.

타자(他者)가 아닌 스스로가 존재. 주문 위안 “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한울님을 모셔 조화가 정해짐을 길이 잊지 아니하면 온갖 일을 알게 되니라.

개벽사상을 전파하고 자유와 평등을 주문하며 일상적인 수행으로 성취한다.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사인여천”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평등 실천, 적서의 차별 없애기, 여성의 처지 개선, 양반 상놈 없애기를 실천하였다.

2) 목민사상

정약용선생이 강진 유배시 1818년 저술한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창도자 최제우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위민사상의 정수 ”목민“은 ”백성을 살찌운다“는 뜻이요, 심서는 몸소 실천은 못하니 마음으로라는 뜻이다. 남접의 전봉준은 젊은 시절에 읽고 국가개혁과 현실개혁 방책을 모색했다. 정약용의 목민사상은 동학혁명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동학의 지도자들은 다산의 계승자이다.

3) 사회계약사상 (루소사상과 비교)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승리 이후 전봉준은 전라감사와 ”전주화약“을 체결한다. 이 화약은 바로 서구 근대혁명의 일종의 사회계약론과 같다. 이 화약에 따라 혁명군은 철수하고 집강소에서 공동 행정을 펼치게 된다.

루소는 하늘이 준 자연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정당한 시민권을 갖기 위해 국가로부터 평등과 자유권을 요구한다. 이른바 사회계약설이다. 이 사상은 로베스피에로등 프랑스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결정적인 혁명의 동력이 되었다. 〈사회계약론〉에서 법은 정당한 주권자인 민중의 집합적 능력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또한 시민인 민중이 복종하여야 하기 때문에 위대한 시민법이다.

2. 농학농민혁명, 시대적 정신의 전개

1) 혁명의 시작과 대규모 집회 (1892~ 1894,1,10 )

1892년 11월 동학교도들이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며 당시 전주군 <삼례 집회>를 열었다. 이날 소장을 내며 전봉준이 역사에 등장난다. 그는 창의문倡義文(봉기할 것을 호소하는 글)을 직접 써서 돌리기도 했다.

전봉준은 광화문 복합상소 (伏閤上疏 ,대궐 앞에 엎드려 소문을 올리는 절차)에서 교조 신원만이 아니라 일본과 서양 세력을 배척한다는 의지도 분명하게 천명했다. 1892년 삼례결사일이 실제 혁명의 시작일이다.

이후 1893년 3월과 4월, 북접 보은집회와 남접 원평집회가 대규모로 열린다.

- 보은 북접 주장

1 .교조 최제우의 원통함 풀라.

2. 교도 탄압 중지하라

3. 외세 물러가라

4. 외국상품배격, 목면입고 국산품 애용하자.

- 원평 남접 기포 준비

교도보다 순수농민 중심, 승려 참여. 보은 북접 봉기에 만반준비

지도부 김덕명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과 북접의 서장옥세력.

결과, 무능한 정부는 개혁은 하지않고 동학토벌작전을 벌인다. 매국노 민영준은 위안스카이에게 청의 구원병을 요청하자 이에 맞서 일본은 정한론을 내세우게 된다.

2) 첫 횃불.. 창의문과 4대강령에 담긴 정신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의 연설, ”들으시오 들으시오 ..“

500명이 횃불에 머리에 두건, 죽창 꼬나든 채, 깃발 들고 11일 새벽 고부관아 동헌 진격하자 조병갑과 구실아치들은 도망한다.

1월17일에 1만여명이 고부 집강 전봉준은 ”창의 격문“을 낭독한다.

2월15일 농민군 김제 동진강 입구 부안해안 근처 백산에 주둔. 흙성을 쌓는다.

3월13일 전봉준은 손화중, 김개남에게 때가 왔다고 설득. 세 지도자 사생 맹세.

3월20일 무장현 당산마을에서 기포.

<창의문>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까닭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인륜의 가장 큰 것이다. 보국 생각없이 녹의만 도적질, 탐학, 학정에 원성이 높다.

8도는 어육이 되고 만민은 도탄에 빠졌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 것을...

8도가 사생의 맹세를 하노니.. ”

- 대장군 전봉준, 총관령 손화중.김개남

<4대강령>

1. 사람 죽이지말고 가축 잡아먹지 말라.

2. 충효 다하여 세상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3. 왜놈 몰아내고 나라 정치 바로 잡는다.

4.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들은 모두 없앤다.

3). 혁명군의 승리와 시대정신 실천 - 전주화약과 집강소

동학군은 4월 27일 새벽, 마침내 전주성 풍남문으로 입성하고 전라감영 중앙 선화당을 대장소로 사용한다.

<전주화약 (全州和約)>

1894년 5월 8일, 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하고 정부와 맺은 조약.(신임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체결)

1. 전주 화약의 결과 동학 농민군은 관군과의 합의로 5월 8일 전주성에서 철수한다.

2. 이후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에서 농민 자치 기구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관민상화”를 실현한다.

<27개조 폐정개혁안>

전주화약후에 6월21일 김학진 감사가 일본경복궁 점령에 국난공동대처를 전봉준에게 요청. 국가적 위기 타협의 산물로 협안한다.

<집강소>

1894년(고종 31) 갑오농민전쟁 때 농민군이 전주화약을 계기로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해 설치했던 일종의 민정기관.

관민상화의 시대.(총지휘부 전주에 선화당을 대도소라 하고 김학진과 대등하게 집행) - 집강소.내 조직 <의사원> 의회 성격.

- <도회> ..총회. 오늘의 지방자치의 효시로서 관과민 협치, 열린 행정 거버넌스.

자주적 근대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성과

- 아테네식 직접민주주의와 비견

집강소는 일종의 시대정신에 입각한 “해방구”라 할 수 있다. 농민군은 전근대의 공고한 사회질서인 신분제도를 타파했다. 종과 상전, 백정과 양반, 여자와 남자, 어린아이와 어른, 평민과 벼슬아치 모두 예외 없이 서로 ‘접장’이라고 부르며 높였고 만나면 맞절을 했다. 그들이 추구한 신분 해방과 평등의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인권사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3. 동학혁명사상과 서양 사회계약사상

동학농민군의 ‘전주화약’ 은 서구철학자들의 ‘사회계약’과 매우 유사하다.

먼저 홉스가 1651년 <리바이어던>(Leviathan) 에서 주장한 ”국가계약설 “과 비교해 본다. 국가(절대군주)는 필요악으로 “한손에는 종교, 한손에는 정치(생존권)”를 든 민중들이 모인 거대한 괴물(성경 욥기, 사탄 묘사)로서 절대권력과 종교권력을 부여 받는다. 입헌군주제하의 사회계약을 말한다.

동학에 적용하면 “한손에 종교인 시천주사상, 한손에 정치인 보국안민“으로 설명된다.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시작한 계약이라 전제 군주와 민중의 계약은 항상 위태롭다. 절대군주는 또한 일종의 사탄으로 틈만 나면 마각을 드러낸다.

존 로크는 발전한 사회계약을 주장한다. 바로 '사회계약론'이다. 시민들은 합의한 의사에 따라 국가의 구성원이 된다. 국가가 계약을 위반하면 구성원들은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 로크는 계약에 의해 형성된 국가와 그 기구들이 맡겨진 임무에 반한 행동을 할 경우 국민이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 동학 혁명군은 국가(사실상 일제)에 저항도 하고 협상(전라감사와 화약)도 한다.

한편,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루소가 말한 자연권(하늘로부터 받은 권리)인 평등과 자유를 근본으로 사회계약을 한다는 점에서 동학의 근본 교리와 상통하다. 동학혁명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은 “평등, 자유, 민주”의 가치를 위한 투쟁이자 자주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외침이었다. 이러한 가치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데에 근대 대한민국시민혁명의 원천이다. 참으로 의미있는 지도를 그려주고 있다.

4. 나가며 - 민족의 영원한 이정표

동학농민혁명은 3·1혁명, 4·19혁명, 반독재·반군부 민주항쟁으로 그 정신이 이어 왔다. 신동엽 시인은 장편서사시 <금강>을 통해 민족의 근대 정신사의 도도한 흐름을 노래한다.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하늘 물 한아름 떠다, / 1919년 우리는 / 우리 얼굴 닦아 놓았다.

1894년쯤엔,/ 돌에도 나무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 금강 서장 2 , 신동엽

동학농민혁명은 인간 평등을 추구하고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또한 자주 국가를 건설하려는 용틀임이었다. 농민과 민중은 국가 권력으로 자행되는 국가 폭력과 외세 침탈에 맞서 목숨을 바쳤다. 혁명의 결과 국가권력과 계약하여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을 기억하며 미래 인권과 통일의 유산으로 삼아야 한다. 동학혁명은 현대사회의 약육강식적 자본주의 모순에서 우리에게 인권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유를 던지고 있다. 남.북 분단의 고착화 되어가는 현실에서 동학의 정신을 바탕으로 미래 통일국가에 대한 염원과 비전을 찾아 봐야 한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근대사를 밝히는 상징”이며 근대 “시민혁명”과 일맥상통한다. 위대한 촛불혁명의 근원으로서 우리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동학혁명의 정신은 민족의 영원한 이정표이다. 

▲ 한봉수 문학평론가,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특임교수 [약력] 1957년 정읍 출생/문학평론가/시인/칼럼니스트/전주고 졸/한국외대 이태리어과 학사 졸/한국외대 정치행정언론대학원 석사 졸/현)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특임교수/현)시로꿈꾸는마을 대표/현)서울교육발전자문위원/전)전라매일논설위원, 사장/전)양무리사랑모임(중증장애시설후원)대표/전)서울시갈등관리심의위원
▲ 한봉수 문학평론가,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특임교수 [약력] 1957년 정읍 출생/문학평론가/시인/칼럼니스트/전주고 졸/한국외대 이태리어과 학사 졸/한국외대 정치행정언론대학원 석사 졸/현)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특임교수/현)시로꿈꾸는마을 대표/현)서울교육발전자문위원/전)전라매일논설위원, 사장/전)양무리사랑모임(중증장애시설후원)대표/전)서울시갈등관리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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