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7 21:53 (토)
[안태근의 다큐 스토리] 안중근 의사 매장지의 증언자 이국성 씨
상태바
[안태근의 다큐 스토리] 안중근 의사 매장지의 증언자 이국성 씨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9.0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국성 씨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매장 추정지에 대해 귀중한 증언을 했다.
▲ 이국성 씨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매장 추정지에 대해 귀중한 증언을 했다.

안 의사의 묘 추정지를 증언하는 이국성 씨의 조부는 우당 이회영 열사이다. 그러나 우당 후손들과의 DNA검사 결과 일치가 안 되어 이국성 씨는 공식적으로 후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등소평 이후 개방과정에서 이국성 씨는 중국의 민정부(보훈처)를 찾아가 자료를 제시하여 우당 이회영은 항일열사로 인정받게 된다.

이국성 씨의 아버지 이충렬 씨는 1957년 숙반(반동처분, 극우파 축출운동) 때 할아버지 우당 이회영의 아들인 것이 밝혀지며 역사이기분자로 몰려서 노동개조를 받으러 농촌(신합진)으로 보내졌고 1994년 10월 20일 사망했다. 그러면서 신합면으로 올 때 당안(서류)이 함께 왔으나 사망 후 그 호적은 취소됐지만 호적등본은 남아있었다.

이충렬은 아버지 이회영이 남한 출신이고 독립군 활동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당시 적아(적대관계)간의 모순으로 처리하여 이충렬 씨의 당안은 공안국 적아 당안실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합진 민정반 당안실은 새로운 당안을 만드는데(복원) 이때 출생년도 기록이 1925년생으로 바뀌어 기록되었다.

그래도 이충렬의 아들인 이국성 씨의 호적은 매화구에 남아있었다. 그가 이회영의 후손임을 밝히기 위한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국가보훈처 직원(O순O)이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불신을 당하게 된다. 해프닝이었지만 이국성 씨 개인에게는 눈물 맺힌 사연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일이 있을까? 본인의 일이나 가족의 일이라면 담당 공무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이 당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공무원들은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

중국 현지에는 아직도 이를 증언해 줄 수 있는 증인들이 지금도 생존해 있다. 배재수(93세, 매화구 시교육국 민족교육관 역임)를 비롯하여 최봉재(86세, 당시 당서기 역임) 씨가 생존하여 이런 역사(사실)들을 확인해 줄 수 있다. 최 씨의 경우 2021년경 귀국하여 한국 안산시에 사는 딸집에 거주하고 있다.

우당은 공식적으로 세 번 결혼하였다. 서 씨와 사이에 태어난 셋째 아들의 아들이 이종찬 전 의원이다. 그녀와 사별 후 이은숙과 결혼하여 그 손자가 이종걸, 이종철이다. 그리고 이국성 씨의 할머니가 되는 이영숙과는 중국 망명 후 항일운동을 하다가 만나 이국성 씨의 아버지인 이귀일을 낳는다. DNA가 일치가 안 되므로 추정되는 것이 이영숙이 임신 후에 우당과 사실혼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닌가 추정을 해본다.

1921년생인 이귀일은 어려서부터 험난하게 살았는데 어머니 이영숙이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던 죽고 양모 배 씨에 의해 천덕꾸러기로 자라 7살부터 12살까지 거지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7세까지 양자로 들어가 그나마 행복한 생활을 하며 목탄자동차 운전을 배웠다. 그뒤 양부는 1937년 북한으로 돌아갔고 그는 의용군에 입대해 항일투쟁에 나선다. 우당이 여순감옥 13호실에 투옥되었다가 교수형당하고 화장되어 이국성 씨의 고모인 딸에 의해 지금의 비무장지대 근처에 묻혔다. 우당의 묘는 지금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는데 이종찬 씨의 말로는 허묘라는 설이 있다.

이귀일은 의용군 시절인 1942년 혹은 1943년에 문덕림의 딸인 문옥자(1926년생)와 결혼하여 이름도 이충렬로 바꾼다. 이귀일(이충렬)은 길림성에서 살았다. 후에 그는 공산당 군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우당의 독립운동 동지인 김효삼과 문 씨 등에게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1940년대 어느 날 여순감옥을 찾아간다.

인민지원군에 운송일을 했던 항일대오 활동으로 여순감옥에서 13호 감옥, 사형장, 화장터 등을 둘러볼 수 있었고 이 때 안중근 의사의 묘도 참배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국성 씨가 길림성 매하구시 회룡현 허와향 신민천 신민조선족소학교 5학년 때인 1958년 아버지 이귀일과 여순 감옥묘지의 안 의사 묘를 참배했다고 한다. 당시 벌써 이곳 일부에 고구마밭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이귀일은 안 의사의 목패(나무묘비)가 없어졌다고 한다. (이귀일 씨가 보았던 목패의 존재에 대한 기사는 대련만보에 실리기도 했다.) 이귀일은 근처의 다른 민간인 묘를 기준으로 해서안의사의 묘를 찾았는데 안 의사의 묘의 목패는 없어졌지만 그 자리에 돌맹이로 열십자(十) 표시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이국성 씨가 13살 때의 기억이다.

안 의사의 묘 자리는 이렇게 이국성 씨에게 알려졌다. 그 자리는 지금 감옥묘지표지석이 서있는 감옥묘지 둘째 열 중간 즈음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15m~30m 안팎이다. 이 증언은 훗날 밝혀진 당시 여순감옥에 근무했던 고가 하쓰이치(古賀初一) 검시의의 증언과 일치된다. 그의 증언도 안 의사는 감옥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 산 끝에 묻혔다고 증언한다.

그것은 1943년에 이곳에 수학여행 왔던 신현만 씨의 증언과도 일치되는 지역이고 이국성 씨의 증언과도 일치되는 곳이다. 단지 신현만과 이국성 두 사람의 증언은 같은 2열이지만 거리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는 감옥묘지가 확장되며 빚어지는 착오가 아닌가 싶다. 신현만 씨는 고인이 되었지만 고 김영광 의원이 그린 지도는 남아있어 증언을 전해주고 있다.

이국성 씨는 문화혁명 기간 중에 다섯 친구와 함께 다시 방문했고 1995년에도 이곳을 방문했다. 그는 이렇게 여러 번 방문하며 안 의사의 묘터를 기억해 두었다. 그는 1999년에 민정부(중국 국가보훈처)에 신청하여 2000년 1월 12일 우당의 혁명열사증을 받았다. 그의 부친인 이귀일은 등소평 개방 후 항일대오로 지정되었고 1994년 10월 20일 타계하였다.

이국성은 1989년 비자신청을 하여 1990년 1월 8일 귀국하였다. 그리고 막노동 일을 하며 지냈고 할아버지인 우당의 발자취와 신흥무관학교 등을 조사하며 많은 돈(약 1억 5천만 원 가량)을 썼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조사한 내용을 책으로 출간하였다. 그는 우당의 후손으로 중국에서도 그러했듯이 독립유공자 후손임을 국가보훈처에 신청하였으나 DNA검사 결과 일치가 안되어 반려되었다.

다음은 이회영 자료 글이다. “이회영(李會榮, 1867년 3월 17일~1932년 11월 17일)은 일제강점기의 한국의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아호는 우당(友堂). 종교는 감리교로서, 대한민국 1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