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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270일간의 기록- 일본 촬영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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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270일간의 기록- 일본 촬영 ③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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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현립대 가와가오루(河かおゐ)교수와 대담
▲ 시가현립대 가와가오루(河かおゐ)교수와 대담

5월 11일(화) 아침부터 서둘러 하나조노 대학의 강제언 교수와 귀환 관련 인터뷰를 하고 자료를 얻다. 또 징병되어 나왔다는 강선국 노인을 만났으나 인터뷰 내용은 별로이다. 건강이 안좋은신데도 동포로서의 관심을 갖고 우리의 일정에 대해 걱정해 주신 할아버지의 마음에 감사하며 긴 얘기를 짧게 마무리 짓고, 11시에 오사카를 출발했다.

2시 40분 니시 마이즈루 항 도착. 주변일대를 돌며 인양기념관, 히가시 마이즈루항, 우키시마호 침몰지역, 순난의 비와 동상, 마이즈루항 잔교(당시 부두다리) 등을 촬영했다. 10시가 되어 밤늦게 시가현 숙소에 도착했다. 무려 오늘만 800km 긴 여정이었다. 드라이버 임 선생은 오사카까지 돌아가야 한다. 통행료만 10만 8천원, 팁 포함해 20만 원을 드렸더니 좀 힘이 나는 듯 했다.

5월 12일(수) 숙소에서 택시를 타고 시가현립대로 이동했다. 시내 10분 거리에 학교가 있었다. 현립대학이 위치하기에는 좀 시골인 듯하나 공부하고 연구하기엔 적당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정돈되고 깨끗한 강의실에서 수업에 열중인 학생들과 자전거로 통학하는 검소한 느낌의 모습들이 차분하다.

인터뷰를 한 가와가오루(河かおゐ)교수는 재일동포와 결혼한 전임교수 3년차로 한국말을 너무 잘하고 젊고 이지적인 여교수다. 우리와 동행한 국민대의 황선익 조교가 먼저 가서 도서관을 뒤져 오후에 자료 촬영을 하였다. 말로만 듣던 ‘박경식 기증문고’이다.

박경식은 재일 한인연구가로 전 조선대 교수였다. 그의 어마어마한 장서가 이곳 시가현립대에 기증되었는데 뜻하지 않은 그의 죽음으로 시가현립대는 횡재를 했는데 한인의 귀환관련 자료가 이곳에 모두 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경식 문고’에는 1300박스의 책 중 20% 정도가 공개되어 1만5,000권만이 진열되어 있다. 총 30만여 점의 문서와 10만여 권의 도서를 2억원에 시가대가 인수했다고 한다.

조선대에서 물러난 박경식 교수가 고서적상을 하며 모았던 책이다. 그 책들이 그가 돌연 교통사고로 타계하며 단지 강덕상 교수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시가대로 온 것이다. 강 교수가 그 엄청난 책의 양을 보고 눈물 흘렸다는 후문인데, 만감이 교차하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5월 13일(목) 09시 28분, 시가에서 신간선을 타고 빗속을 질주해 11시 43분 도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관동대진재조선인희생자추모비 및 신주쿠 한인거리를 촬영했다. 일본 출장도 한 열흘 정도가 지나고 어제 박경식 문고를 보고 난 절실한 내 느낌을 정리해본다.

일제강점기에, 500만 명이 해외로 나갔는데 그 이주 루트와 귀환사를 최초로 추적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광복절특집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2부작은 일제가 불사르고 없앤 자료와 일본정부, 경찰, 우익의 비공개자료를 제외하고 찾을 수 있는 기록이 얼마나 될까하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워낙 방대한 자료로 2부작의 한계선을 뛰어넘고 있었고 자료는 내가 읽을 수 있는 한계량을 벗어나 있었다. 처음 다루는 소재의 시행착오 느낌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귀환이라는 말 대신에 인양(引揚)이라는 표현을 쓴다. 물속에 잠긴 것을 끌어올린다는 적극적인 단어를 쓰며 아울러 국민의 권리까지도 복원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유골마저도 타국에 방치시켜 놓고 있는 현실을 보며 답답함을 넘어서는 안타까움이 선을 넘어 분노가 느껴진다.

국가가 과연 이럴 수 있을까? 선조들을 이국땅에 방치하는 건 국가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않는 일이다. 당장에라도 모셔와 고향 땅에 묻어드려야 한다. 지금까지는 몰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방송이 나간 후에 반응이 어떨지 지켜볼 일이다.

5월 14일(금) 유텐지의 조선인 위패를 촬영하러 갔다. 실상 중요한 위패는 함 속에 채워져 외경만 찍었다. 키는 따로 보관하고 열 수는 없다는 대답이다. 한인 위패를 잠궈서 보관한다는 것도 이해가 안되는데... 공개 못할 사연은 뭔지? 시간 끌기일까?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서 알게 되어 평화기념전시자료관(독립법인 이라지만 국가기관이다)을 방문했다. 촬영불가- “돌연히 찾아오셔서 안됩니다.” 까지는 이해되나 확인 전화까지 걸어와 “아까 만나기 이전에 찍었다는데 그 사진 쓰시면 안됩니다...” “저작권...”을 운운하며... “안 상에게 전해주십시오.” 하며 집요함을 보여준다.

왜 이토록 집요하게 나올까? 자료관 설립목적의 의구심을 갖게 한다. 전시물의 내용이나 의도는 ‘평화’ 두 글자를 ‘전쟁’으로 바꿔도 좋을듯한 피해의식과 호전성, 정당성을 교묘히 섞은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은 내가 한국인이라서 갖는 피해의식일까? 아니라면 더불어 희생당한 외국인에 대한 문구정도는 소개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일본인들에게 과한 기대이기는 하다.

스가모 형무소 터를 찍고 사할린귀환재일한국인회 이희팔 회장을 인터뷰하다. 울먹이는 그의 모습이 보기 민망하다. 사할린에 남겨진 4만여 명 동포에 대한 회한의 눈물일진대 아직 그 느낌이 공감이 되진 않아 민망할 따름이다. 당사자의 마음을 못 느끼는 나나 이것을 보고 실감하지 못할 모든 이들에게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간 과거의 일일뿐이다. 어떻게 해야 과연 전달이 될까? 큰 과제이다. 밤에 재일동포 출판인인 김용권 씨를 인터뷰했다.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곳이 고향이예요. 우리 엄마 아직도 일본말 못하고...” 고향에 대한 역설적인 웅변이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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