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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의 문학산책] 길선이 누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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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의 문학산책] 길선이 누나 (시)
  • 한봉수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0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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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촌 한봉수/시인/전라매일 사장,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책대학원 졸업, ​​​​​​​한국외대 정책대학원 총동문회장(1기)
▲ 몽촌 한봉수/시인/전라매일 사장,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책대학원 졸업, 한국외대 정책대학원 총동문회장(1기)

길선이 누나 
                                   몽촌  한봉수

나이 열 살 소녀
보리피리 들리듯 배고프고
매미소리 귀에 맴돌며
엄니는 꿈처럼 떠났다

만경강 눈보라 흩날리고
철교를 막 건너온 증기기차가
요란하게 싣고 간 오빠는
시든 억새풀에 눈발 새어들어가듯
몇 년째 소식도 없다

먼 친척집 끼니 더 건너니
소학교 마치자 할 수없이
건넌 반 선생님 손잡고
배차장에서 수백리 길
채정승이 귀양 왔다는
칠보산 끝자락,
길선이 누나는
귀양실에 이렇게 왔다.

가세가 큰 집안에
딸인 듯 손녀인 듯
그래도 반은 머슴인 듯 살았다

뻐꾸기 소리 어쩜 같고
마을 앞 논들 끼고 도는
시냇물에도 잘도 참았단 눈물이
밤마다 찾아오면 다독다독
벗 삼아 살아왔다.

평생의 새벽
할머니는 방마다 들리도록
골방기도를 할 때 기도엔
길선이 누나도 있었다.
기도들은 세월 따라 기적같이
이루어져 갔으나
길선이 누나에게는 반만 된 것 같다.

시련이 왔다.
시퍼런 처녀가 탈곡기에
아차 한 팔을 잃고
남은 한 팔로 살았다.
빨래도 하고 바느질도 해내며
못하는 일 없이 당당했지만
반은 기쁨이면 반은 슬픔이다.

할머니가 당숙네 방앗간
힘센 일꾼에게 꽃가마 태워 보내니
칠보산부터 온 동네 기뻐하고
길선이 누나는
십 년은 얘들도 낳고 잘 살았다.

방앗간이 문 닫을 때쯤
힘센 그 일꾼은 처가 빽으로
병원에 취직하더니
어느 여편네와 눈 맞아
쥐새끼 구멍 찾듯 도망갔다.

엄니도 고향도 한 팔도 잃어 본
길선이 누나는 그깟놈 서방이야
겉으로는 고고한 암탉처럼 당당하였다.

길선이 누나는 추석 때면
칠보산 끝자락,
온 가족이 모이는 선산에 꼭 왔다.
어린 딸아이를 손잡고 오더니
아이가 처녀가 되고 시집가니
손주도 보고 세월이 가고
몇 해부터인가 선산에서 볼 수 없다.

수백리 만경강 건너엔
친 엄니 무덤도
태어난 고향도 있으련만
그건 잊은 지 오래다.

길선이 누나의 귀양실 육십 년
생각해보니
모두가 빛나는 눈물이다.

- 한봉수 시집, <날더러 숲처럼 살라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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