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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대학원 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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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대학원 진학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8.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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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장의 졸업증에 나의 학부시절 꿈이 담겨있다.
▲ 이 한 장의 졸업증에 나의 학부시절 꿈이 담겨있다.

2008년 11월 6일, 대학원 박사과정의 합격발표가 있었다. 지난번에 있었던 면접에서 “후진양성에 힘써달라”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합격 예감을 했지만 정작 소식을 듣고 보니 감회가 새롭다. 나는 학부를 졸업한지 20년 만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1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0년 단위로 학위를 받는 셈인데 보통 만학도가 아니다.

석, 박사 학위 취득이 내 인생에 설계되어 있던 것은 아니지만 노력하다보니 이룬 성과이다. 그러나 우연은 없다. 석사 취득은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논문 토픽을 찾았고 스스로 일구어낸 결과이다. 박사학위 역시도 내 스스로 결정하고 결국은 7학기 만에 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 곁에서 가족처럼 자극을 주고 도와준 분들의 공이다.

박사를 받았다고 당장에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현직인 방송인 생활을 하며 강의를 겸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머릿속의 구상은 컸다. 더 많은 제자들을 만나고 연구 성과를 낼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욕심도 아니고 열심히 살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학부를 졸업하면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며 영화계로도 진출하고 대학원에도 진학하는 꿈을 꾸었다. 그것도 해외유학으로 미국의 UCLA(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이다. 그것은 당대 유명 감독들의 출신교로 국내에서는 하길종 감독이 졸업했다. 그 학교를 졸업하면 내 인생에 광명이 내릴 것 같았다. 그러나 내게는 언감생심이고 그저 국내에서 방법을 돌파해보아야 했다. 영화계에 입문하여 생활고를 겪으며 대학원 진학의 꿈은 점점 멀어지고 독립영화 감독으로서 생업에 열심이었다.

부모님에게 신세를 지지 않겠다는 것이 영화계에 입문하며 가진 포부였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취지로 시작한 체육관 오픈부터가 신세를 지는 일이었다. 잔손을 벌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체육관은 아버지의 신용을 담보로 시설비를 빚지며 시작했으나 운영을 하며 모두 갚았다. 아버님의 이런 후원이 아니면 영화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위기 탈출의 심정이었다.

EBS에 입사하여 생활고는 벗어났지만 내 앞 길은 첩첩산중이었다. 본가에서 독립하며 우면동의 작은 빌라의 전세를 시작했는데 영 공부와는 인연이 끊긴 듯했다. 마침 중국으로 특집 다큐 <일제강점기의 영화>를 촬영하러 북경영화아카데미를 갔다. 우리는 쓰지 않는 흑판에 초라한 책, 걸상의 놓인 교실을 보며 “아, 이런 상황이 중국영화에 혼을 불러일으켰구나!” 싶었다.

귀국하여 진지하게 중국 유학을 생각했지만 택도 없는 일이었다. 다큐를 완성하고 상해파 한국영화인들에 대한 내용을 담은 다큐가 방송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상해로 가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 영화 <애국혼>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렇게 그 영화의 각본, 감독, 주인공인 정기탁 감독을 발굴해내었다. 내가 연구자는 아니지만 특종이었고 이는 논문으로 길이 남겨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는 교수들에게 이런 중요한 사실과 인물에 대해 설명하자 관심 갖는 이는 있었지만 논문을 쓰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유일하게 도움말을 주신 분은 다름 아닌 동문 산악회인 거북이산악회의 이영민 회장이다. 그는 만학도로 동국대 영화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한 상태였다. 나는 이 회장의 격려와 성원에 힘입어 직접 논문을 쓰고자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다.

주간에 다니는 일반대학원은 힘들었고 야간에 수업을 듣는 특수대학원 중에서 본가 앞에 위치한 한국외대를 선택하고 정책대학원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만학도이지만 드디어 대학원 입학의 꿈을 이루었고 이는 내 인생에서 아주 잘한 선택 중 하나이다. “늦더라도 꿈이 있다면 입학하라!”

입학하기 전에 이영민 회장의 지도 아래 논문의 목차를 잡았고 반쯤은 쓴 상태였다. 이미 다큐멘터리로 만들며 해설대본을 쓰며 전체 구성은 잡혀있었다. 수업은 야간에 진행됐고 3교시는 인근의 호프집이었다. 5학기를 다니며 최영 교수님의 지도를 받아 논문은 완성되었다. 그렇게 「일제강점기 상해파 한국영화인 연구」 논문이 완성되었고 일사천리로 석사 졸업을 하였다.

졸업 후 나의 대학강의가 시작되었다. 꿈에 그러던 계획 중 하나를 실현한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동문인 우동우 후배가 찾아와 한국외대의 문화콘텐츠 학과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긴 얘기를 듣지 않고도 나는 이미 입학 결심을 하였다. 입학시험은 비교적 우호적인 분위기였고 나는 2009년 초에 입학을 하여 학부 강의를 하며 대학원 수업을 들었다.

내가 박사공부를 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별일이다. “박사 따서 뭐 할 건데?” 묻는 선배도 있었다. “인생 뭐있어? 공부나 하지!” 느림보 학생의 늦은 깨달음이다.

그리고 임대근 교수님을 만났다. 중국영화 전문가인 임 교수님을 만난 건 하늘의 도움이다. 나는 평소부터 생각해두었던 합작영화에 대한 논문을 이미 준비 중이었고 박사논문으로 제안하여 준비를 해나갔다. 논문은 위장합작영화라는 금기 영역을 다룰 수밖에 없었고 나는 이소룡 세미나 현장에 관련영화인들을 모셔 이야기를 공식석상에서 풀어냈다.

논문은 박사과정 수료 후 1년 후에 완성되었고 임대근 교수 외에 영화계 원로인 김종원 교수, 청주대 김수남 교수, 광운대의 강성률 교수, 한국외대의 박치완 교수가 심사에 참여해 통과되었고 졸업식을 가졌다. 드디어 학부생 때부터 가졌던 꿈을 실현하는 순간이다.

나의 은사이신 임대근 교수님은 제자 모두에게 아호를 지어주셨는데 내게는 앙리(仰理)라는 과분한 호를 주셨다. 앙리란 “이치를 따지다”라는 뜻으로 ‘우러를’ 앙(仰) ‘다스릴’ 리(理)이다 교수님이 생각하는 나의 미래를 위한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변해 교수님에 대한 시각들이 과거와 많이 달라지고 있지만 이러한 스승을 둔 제자는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 안태근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졸업,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졸업,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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