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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회고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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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회고를 마치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8.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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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서울필름아카데미 사무실에서
▲ 2022년 서울필름아카데미 사무실에서

나는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그 시대 출생자들이 그러하듯이 풍족하지 않고 가난하게 살았다. 왕십리에 살면서 사교육을 받았지만 지금같이 치열하지 않아 덕분에 산으로 강으로 놀러 다니며 꿈을 키웠다. 그러나 배불리 먹지 못했고 항상 먹을 것을 귀하게 여겼다. 외견상으로 보이는 금수저 캐릭터와는 전혀 다르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또 문화생활을 좀 다르게 표현해 취미생활이라고 표현한다면 극히 단순해 영화구경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들어가서야 카메라를 사서 만지게 되었다. 그리고 3공의 억압통치 아래 획일적인 교육을 받으며 컸는데 상징적인 것이 국민교육헌장 암기였다.

이런 시대상황에서 자란만치 정신력이 강인해질 수밖에 없는데 군대에 가서도 빳다 맞는 것을 당연시했고 남자로 커가는 과정으로 여겼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커온 세대이다. 추위에 떨며 다녀도 신났고 학교 운동장에서 웅크려 앉아 영화를 봐도 즐거웠다.

외식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사주시는 자장면이면 최고였던 시대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며 생활 형편들이 좀 나아지긴 했어도 참 고달픈 세상이었다. 그것이 확연히 나아졌다고 느낄 수 있었던 게 전두환 시대였다. 일상생활에서 육류를 먹게 되었는데 그가 잘해서가 아니라 전임자 때 허리띠를 졸라매고 애써 모았던 창고를 열었기 때문인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모든 것에 있어서 철두철미한 사람이 되었다. 유전인자로 인한 성격인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많이 고쳐 설렁설렁 살려고 한다. 그렇듯 결심하고 일을 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일을 하면 될 때까지 해서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중앙대를 졸업 후 충무로로 나가 고생을 사서하고 문화영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를 거쳐 방송사 PD를 하였다. 편집을 하는 것을 봐도 끝장을 본다. 대충 AD에게 맡길 법도 한데 그냥 내가 해야 속이 편하다. 두 번 일을 하느니 차라리 내가 하고 만다. 이러니 후배들에게 해줄 말도 많다.

사실 이러한 열정으로 사람들이 피곤해 하기에 흔히 하는 얘기로 물가로까지의 안내로 끝내려 한다. 억지로 물을 먹일 수도 없거니와 결국에 가서는 서로 피곤하기 때문이다. 자식들도 억지로 안 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생각과 성장배경이 다른 사람들을 감당할 것인가? K교수가 그랬듯이 적당히 포기하며 가르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인생살이라는 게 적당히 포기하면서 사는 것인데 내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뒷받침도 건강이 허락되어야 가능한 것인데 나는 크지 않은 체격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체질이다. 성격이 이러한 건강을 유지시켰는지도 모르겠으나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2년 내내 성균관대 검도부에서 꾸준히 운동을 하였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새벽에 태권도장에 다녔고 오후엔 역도부와 검도부에서 꾸준히 운동을 하였다. 이렇듯 운동을 하며 건강을 다졌다. 등산도 아버지 산악회 따라 다닌 것부터 치면 벌써 50년이다. 군 생활까지 인제에서 하며 산에서 살다왔으니 산과도 참 별난 인연이다.

지금도 내 고집대로 일을 하고 버텨낼 수 있는 건 이런저런 결과인데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체력적인 건강보다도 본인의 의지력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들은 아이들과 친척동생들에게 선조들이 어떤 분들이고 우리는 누구였는지를 알리기 위해 집필하게 되었다. 단순한 자서전에 다름 아니었다.

처음에 100회를 예정하고 집필에 들어갔지만 프로그램 제작기가 시작되며 분량이 늘어나 200여회 분량이 되었다. 미처 몰랐는데 쓰다 보니 엄청 많은 일을 했던 것을 실감했다. 누가 보면 슈퍼맨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특별히 그런 것은 아니고 기록을 잘 남겨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400회까지 연재를 마쳤다.

새삼 기록의 소중함을 느꼈다. 그것은 다큐멘터리 감독이기 때문에 했던 것이 아니고 시나리오 작가이기 때문에 글쓰기 차원에서 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누구이고 우리의 선조들은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록의 빠진 부분을 줄이고자 했다. 그것은 기억 속에 묻혀버려서는 안되기에 전화 인터뷰를 하여 빈 칸을 채워 넣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없는 것은 나의 능력보다는 한계일 뿐이다.

단 가감 없는 실상을 담으려 노력했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기록하려 애썼다. 그래도 지상매체에 공개되는 글이기에 사적인 기록이나 신상에 관한 일부 기록은 칼럼에서 뺐다. 회고를 마친 지금의 심정은 자손들에게 또 부모님에게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나만의 의지는 아니었고 거대한 물레방아가 물 따라 돌아간 느낌이다.

더 잘할 수 있었고 또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고집스럽게 외길인생을 살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외길 인생을 살아온 나를 스스로 격려해본다. 칼럼은 분량 문제로 나의 생각과 인생론 등은 뺐다. 하지만 별도로 추가하지 않아도 그 모든 것들이 내가 해왔던 일들 속에 녹아있다는 생각에서이다.

2023년 8월 10일 양재동에서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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