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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시련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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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시련 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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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을 꿈꾸었던 대학시절, 선배들은 나를 ‘안감독’이라고 부르며 꿈을 부추겼다.
▲ 영화감독을 꿈꾸었던 대학시절, 선배들은 나를 ‘안감독’이라고 부르며 꿈을 부추겼다.

글을 쓰다 보니 좋은 일들만 쓴 것 같아 안 좋았던 일에 대한 것도 생각해보았다. 나의 어린 시절은 한국전쟁 후이라 모두가 힘들게 살았으므로 그것이 시련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의 첫 시련은 중학교 시절이다. 신상옥 감독이 설립한 안양영화예술고로 진학이 좌절 되었을 때이다. 최근에 친척과의 만남 자리에서 어머니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를 하셨다.

안양예고를 찾아가 최은희 교장을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인데 나를 불합격 시켜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최 교장이 놀라 이유를 묻자 “아들이 하나이기 때문에...”라고 간절히 답했다는 것이다. 지방에 사셨던 큰아버지도 올라오시고 가족회의 결과 나는 결국 그 학교로의 진학은 불발되었다.

당시로는 나의 고교진학이 집안의 큰 이슈가 된 것이 내가 남자 형제 중 맏이이기에 내가 잘 풀려야 한다는 생각이셨던 같다. 당시 영화인이 된다는 것은 가산탕진, 패가망신이라는 속설을 들은 어르신들의 걱정이었다. 나로서는 승복할 수 없었지만 결국 어른들의 뜻대로 일반고로 진학을 했고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진로를 잡았다.

두 번째 시련이라면 대학 졸업 후이다. 당시 이응우 학과장은 내게 취직할 것을 권유하셨는데 나는 영화계로 진출하겠다고 뜻을 밝혔다. 이 학과장은 놀라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그러냐?”며 나를 극구 말렸다. 그러나 영화계 진출은 나의 오랜 소망이었기에 뜻을 굽힐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영화인협회장이었던 변장호 감독의 연출부로 들어갔는데 변 감독은 영화법 개정 문제로 시나리오 두세 권을 주고는 영화 찍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무위도식하며 몇 달 가량을 기다리다가 이건 아니라는 판단에 우진필름의 기획실장인 유영무 선배를 찾아갔다. 당시 우진필름은 동시녹음을 시도하며 한국영화의 세계진출을 선도하던 영화사였다.

사장인 정진우 감독은 <여명의 눈동자> 촬영 중 모종의 무고한 사건에 휘말려 투옥되었다가 출소한 상태였고 촬영의 재개는 금방 되지 않았다. 나는 기다림에 지쳐갔다. 영화계 입문은 하였지만 변변히 촬영현장 한 번을 겪지 못했다. 어른들의 걱정이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우진필름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니 영화계 입문은 후회로 다가왔고 돈 많이 준다는 광고회사로 갈까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만족>이라는 시나리오를 받았다. <여명의 눈동자>는 보류되고 정 감독은 새 시나리오를 결정했는데 신일룡, 이미숙 주연이었다. 어느덧 일 년을 허송세월하고 받은 시나리오라서 심기일전하며 촬영 준비를 하였다. 영화의 제목은 <두견새 왜 피를 토했나>에서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촬영은 순조롭게 시작되었으나 조연을 맡았던 김OO 탤런트가 데려온 배우지망생 때문에 일이 이상하게 꼬여버렸다. 주인공인 신일룡 배우는 정 감독과 언쟁이 붙었고 촬영 현장을 떠났다. 촬영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망연자실해진 스태프들은 촬영이 재개되기만을 기다렸으나 각기 차기작품을 찾아 떠났다. 결국 촬영은 일 년 후 재개되었는데 나 역시도 임권택 감독의 연출팀에 합류한 상황이었다.

영화계 일이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크랭크 인도 힘들지만 개봉까지 험난한 여정을 겪어야 하고 흥행이라는 마지막 변수까지 모든 것이 난관 투성이다. 그러함에도 영화를 만들어내는 영화인들은 초인들이다. 나는 임 감독 연출팀에서 문화영화 <이명수 특공대>를 마치고 태흥영화사 창립작품인 <비구니>를 준비하고 드디어 크랭크 인하였다.

영화의 1/3을 촬영했을 때쯤 비구니들이 영화의 외설성을 문제 삼아 촬영 중단 시위를 하고 결국 영화는 제작 중단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인데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을 문제 삼은 격이다. 당시는 임 감독님도 슬럼프였다. 학생시위를 소재로 <도바리>를 기획했지만 당시 분위기로는 절대 제작될 수 없는 기획이었다.

나는 5년의 지난한 조감독 생활을 청산하고 문화영화 일을 시작했다. 더 이상의 기다림을 버텨낼 자신도 없었고 내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문화영화란 용어는 지금은 쓰지 않는 말인데 비극영화인 다큐멘터리, 홍보영화 등을 일컫는 말이다. 독립영화 감독이라 온갖 힘든 일의 연속이지만 내 작품을 만드니 행복했다. 나는 EBS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36편의 문화영화 감독이나 시나리오를 집필하였다.

영화계 입문하여 조감독 시절은 5년은 막연한 기다림으로 슬럼프를 겪었다면 5년은 문화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로 바빴던 시기이다. 앞의 5년 시절의 고통이 나를 더욱 굳건하게 해주었지만 생계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부업이라고 체육관을 운영하며 버텨냈는데 내게는 본격적인 시련기였다.

그런 혹독한 시련기를 잘 버텨낸 나는 행운아이다. 나 같은 상황은 누구라도 겪게 되는데 심중팔구는 부업이 본업이 되며 영화일은 영영 이별이다. 백 명 중 팔구십 명이 겪는 일로 전업을 하게 되면 영화계 복귀는 거의가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시련기를 버텨냈으니 행운아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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