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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내 어릴 적 왕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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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내 어릴 적 왕십리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5.24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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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왕십리역 앞
▲ 2010년 왕십리역 앞

'왕십리'는 조선 건국 때 무학대사가 십리를 더 가서 왕궁터를 잡으라는 농부의 권유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 후 소월의 '왕십리' 시도 나오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도 나오고 김흥국 가수의 노래도 나온 정겨운 지명인데... 나 역시도 왕십리가 고향이라서 당시 나의 기억을 정리해 본다.

나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황해도 해주에서 인천을 거쳐 서울로 와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왕십리와 청량리 인접지역인 용두동에 살았다. 나의 원적은 황해도 해주시 북욱동이고 본적은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이다.

왕십리라는 지명은 지금의 도선동에서부터 행당동, 신당동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다. 너무 넓어서 상왕십리, 하왕십리로 신당동을 기준으로 나뉜다. 쉽게 말해서 한양대를 벗어난 지점부터해서 동국대 전까지라고 보면 되는데, 조선조 때에는 광희문 아래 깍정이 패라고 불리우는 서민들이 모여 살았고 돌림병이라도 돌면 밤에 시체를 버리던 곳이라 전해지는데 방학기의 만화 <바리데기>에도 소개가 된 바 있는 그야 말로 옛 지명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남산과 인접해 산 넘어 일본인 지역과 대립각을 세웠던 곳이었고 광복 이후에는 나전칠기 가게와 공장, 대장간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중앙시장이라는 당시 대표적인 시장이 있어 사람들이 밀집해 살았는데 내 고모할머니도 고무신 장사를 하여서 기반을 잡으셨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에는 인민군이 쳐들어와 모두 피난을 갔는데 바로 아래 한강변까지 갔으나 배도 없고 해서 모두 집으로 돌아와 인민군 치하에서 서울 수복 때까지 숨죽여 살았다는 약수동 사는 친척 아저씨의 증언이 기억난다. 인민군들의 잔학상은 퇴각 때였다는데 그 참담함이야 두말 할 나위없다. 전쟁 후 왕십리는 용산, 청량리, 동대문, 서대문, 신촌 등의 지역과 함께 문 밖 동네를 이루었다.

'문 밖'이라 함은 사대문 안을 "문 안"이라 하여 구분 짓던 명칭으로 일반 서민들이 모여 살던 동네를 말함이다. 문안에는 부유층이나 사무실 빌딩이 주로 자리했는데 지금의 강남이라고나 할까. 세월이 흘러 왕십리를 중심으로 청계천 상가지역이 형성되고 도깨비 시장이 들어서고 남산 기슭에는 신라호텔까지 자리하며 옛날의 왕십리 일대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특히 대학교가 자리해 환승지역으로 자리 잡으며 약속의 장소가 되기도 했는데 전차가 이 곳 뚝섬에까지 다녔고 아베크족으로 불리던 청춘남녀가 뚝섬에서 뱃놀이도 하고 인근의 경마장 가서 말구경도 하고 광나루까지 가서 물놀이를 하던 기억도 난다.

조선조에 놓아진 옛 돌다리인 살곶이다리도 남아 있는데 지금의 말죽거리처럼 말을 기르던 사근동, 마장동의 지명 유래도 재미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베이비붐 세대인 나는 행당동에 살았었다. '마당 깊은 집'이라는 느낌인데 부모님 따라 월남하신 우리 아버님이 고모할머니의 중매로 우리 어머님을 만난 곳이 왕십리이고 삶의 터전도 왕십리에 잡으셨다.

나도 크면서 예전에 살던 집이 궁금해 찾아가본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집이 적어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큰 것을 생각지 못한 건데 여러분들도 그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 있는 '동명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신당동에 있는 '광희중학교'를 다녔다. 모교인 그 중학교는 지금 강변으로 이전했다.

나는 어려서 기억이 안 나지만 동네에 연극배우 출신으로 대학교수가 된 안민수 씨가 살았다. 그는 1940년 생으로 당시 그가 대학생이었다니 미루어 짐작해보면 나는 4~5세였을 것이다. 그가 나의 집에 놀러 와서 애였던 나를 보며 어떻게 했길래 내가 울음보를 터뜨렸다는 얘기도 나중에 어머니에게 들었다. 아무래도 문안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들며 문화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살지 않았을까?

응봉산을 끼고 있고 한강을 바라볼 수 있는 이곳이 아무래도 운치가 있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살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봄꽃 필 무렵 1호선 전철을 타고 옥수동까지 가다보면 경치가 그만이다. 파리의 세느강을 안 본 사람들조차 여기가 세느강변이 아닌가 감탄을 한다. 1980년 이장호 감독의 화제작인 <바람 불어 좋은 날>도 이곳 달동네를 배경으로 촬영하였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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