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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 중국 촬영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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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 중국 촬영 ⑤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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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의 막고굴
▲ 돈황의 막고굴

시안의 병마용 내부에서는 공안의 제지로 촬영 중 저지당했다. 병마용은 진시황의 광기가 빚어낸 역사의 현장이다. 차로 십여 분 거리에 있는 진시황릉은 산 전체가 능인데 그 주변을 병마용이 둘러싸고 있다고 하니 절대권력자의 오만이다. 능의 지하엔 궁전이 있다는데 아직 발굴은 그 엄청난 규모로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식사를 하고 시안촬영소를 찾아갔다. 촬영소는 1950년대 즈음에 세워진 듯 낡고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촬영이 있을 때만 스튜디오를 운용한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 2만 평 규모의 촬영소를 중심가에 세울 리는 만무하고 세월의 흐름 속에 이곳이 중심지가 된 듯하다.

그 옆에는 영화학교가 있는데 방학이라 학생들은 없었다. 이곳 촬영소에서 제작되거나 촬영된 영화가 많다. 학교와 촬영소 곳곳에는 이곳에서 만들어진 영화 포스터가 많이 걸려있었다. 우선 이곳이 고향인 장예모 감독의 8,90년대 영화인 <홍고량>, <책상서랍속의 작은 동화>와 그밖에 <낡은 우물>, <쌍기진 도객> 등의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관광객 도착 시간에 맞춰 대안탑이 있는 자운사를 찾아갔다. 부산에서 비행기로 3시간 만에 도착한 교장선생님 방문단을 찍고 인터뷰했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시안공항으로 가서 탑승수속하고 19시 20분에 출발해 2시간 10분 걸려 둔황공항에 도착했다. 여행사에서 보낸 차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4월달에 묵었던 돈황태양대주점이다. 일생에 한 번 오기도 힘든 곳을 답사 후 몇 달 만에 다시 왔다.

촬영 미수로 끝난 돈황의 막고굴은 청말(淸末)에 영국인 고고학자 스타인(Aurel Stein)이 1907년 및 1908년에 이곳의 불교 유물을 반출됨으로써 세계에 알려졌다. 돈황 석굴 17호 굴은 귀중한 불경들이 숨켜져 있다가 발견되어 서양인 학자들에 의해 밀반출된 곳이다. 그 뒤에 일본인들도 가져가고 일부는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에도 어찌어찌하여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 굴에서는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발견되었다.

막고굴은 오래된 불교유적지로 불화 및 불상 등이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슬람교도들과 서구 탐험가들에 의해 많은 부분 훼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시 실내촬영은 금지되었는데 워낙 오래된 유적이기 이해될 수 있다.

이곳을 2007년 4월 말에 답사를 하였다. 당시 소형 디지털 카메라조차도 반입이 안 되고 중국은 그야말로 이 굴을 애지중지 하고 있다. 이 굴 뿐만이 아니다. 모든 곳이 일단 촬영팀과 차단되고 있다. 카메라에 대한 불신감과 역사 문제에 관한한 일체의 허용을 불허하는 중국이다.

17호 굴의 벽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서역인 특유의 불화일 뿐이다. 고구려 불화가들이 가서 그렸다는 뚜렷한 반증도 없다. 닮은꼴이라면 무용총에 나오는 수렵도의 원형이라고 판단되는 벽화를 도록에서 확인하였을 뿐이다.

내가 17호 굴의 벽화가 고구려 벽화의 원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수렵도보다 훨씬 유치하고 그림의 수준이 수렵도의 초기 형태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곳의 수렵도 초기구성이 고구려로 전해져 훨씬 세련되고 정형화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어느 벽화가 먼저 그려졌는지는 탄소 연대 측정으로 확인해봐야 할 일이다. 고분벽화나 불화연구가들의 몫이겠다.

17호 굴의 불화에 그려진 가방은 지금 보아도 손색없는 멋진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었다. 당시에 어깨에 걸어 쓰던 것을 그대로 옮겼음직한데 이곳을 설명하던 해설자가 격찬할 만하다. 우리 촬영팀은 촬영 허가를 신청하고 기회를 엿보았으나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그저 문밖에서 바라만 보다가 돌아섰다. 그래서 둔황시장을 연결하였으나 국가가 직접 관리하기 때문에 촬영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1988년에 일본의 사또 슌야 감독이 이곳의 양관성과 유물을 배경으로 극영화 <돈황>을 찍었었다. 1932년생인 사또 감독은 1963년 <육군 잔혹이야기>로 데뷔해 1975년 <신간센 대폭발>, 1977년 <인간의 증명>, 1978년 <야성의 증명> 등을 만든 감독이다. <돈황> 제작 당시 그들은 막고굴 세트를 만들어 자유자재로 카메라를 들이댔다.

이 영화는 사막을 배경으로 몰아치는 전쟁의 회오리 속에 둔황의 문화를 지키려는 주인공들의 사랑과 운명을 스펙터클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작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일본의 다이에이(大映)와 중국전영합작제편공사가 협력하고 육군인민해방군81제편대가 참여한 이 영화는 당시 45억 엔의 제작비를 들인 대작이었다.

그러한 제작비이니 막고굴을 실제 촬영한 것이 아니고 재현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 영화는 당시 일본 흥행기록을 깨고 NHK의 <실크로드>와 함께 일본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곳으로 모은 작품이 되었다. 나는 1992년 타이완에서 VHS로 처음 보았고 이번에 DVD로 다시 보았는데 역시 명편이다. 막고굴과 같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중국이나 그것을 자국 영화로 만들어낸 일본이나 모두 우리에겐 자극제가 되고 있다.

막고굴 입구에 세워놓은 입간판에는 석굴보존을 위해 거액을 희사했다는 인사들을 소개하고 있다. 막고굴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우리가 볼 수 있는 막고굴은 훼손이 적은 상태이다. 지금 관람객들의 이동로는 그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유물의 보존은 우리 모두의 관심과 의무이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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