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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홍콩 골든하베스트의 레이몬드 초우 회장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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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홍콩 골든하베스트의 레이몬드 초우 회장 ①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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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몬드 초우 회장(출처: scmp.com)
▲ 레이몬드 초우 회장(출처: scmp.com)

레이몬드 초우(Raymond Chow/추문회/鄒文懷/초우만와이/Chow Man Wai)는 1971년부터 <천룡팔장>, <도불류인>, <당산대형>, <정무문>, <합기도>, <맹룡과강>, <용호금강>, <용쟁호투> 등을 제작하며 신생영화사인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가화전영유한공사/嘉禾電影有限公司)를 쇼브라더스와 견줄 수 있는 회사로 안착시킨다. 그것은 온갖 악조건에서 일구어낸 혁명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27년 10월 8일 생으로 쇼브라더스사의 기획책임자로 런런쇼를 도와 쇼브라더스를 아시아 굴지의 영화사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1970년에 그가 설립한 골든하베스트에 하관창(何冠昌/레오나드 호), 렁펑(梁風) 등이 함께 참여했다. 그는 신문사 기자를 거쳐 쇼브라더스에 스카우트되어 기획실에서 런런쇼를 보좌해왔다.

1970년도에 런런쇼의 지인인 모나펑이 제작책임자로 부임해오자 그는 쇼브라더스사를 퇴임하고 골든하베스트사를 설립한다. 그리고 정창화 감독이나 나유, 오가양 감독 등을 영입한다. 그들은 스튜디오도 없는 열악한 상황이라 로케이션 영화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배급할 극장도 없는 열악한 상태에서 출발한 그들은 스튜디오 제작의 시대극을 탈피해 저예산의 현대물을 촬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일본과의 합작영화인 <외팔이와 맹협(독비도대전맹협)>을 동남아와 한국에 배급하고 해외 화교자본을 투자받아 영화를 제작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소룡과 두 편을 계약해 태국에서 <당산대형>을 촬영한다. 이 영화는 오가양 감독에게 맡겼으나 이소룡과 불화로 나유 감독으로 교체된다. 한편 정창화 감독은 한국 로케이션으로 우진필름과 합작으로 <흑야괴객>을 촬영했다.

이런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 출발했으나 뜻밖에 <당산대형>이 홍콩 흥행기록을 경신하는 큰 성공을 거두며 골든하베스트는 영화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소룡의 두 번째 영화인 <정무문>이 다시 홍콩 흥행기록을 경신하며 골든하베스트는 제작사로 안착한다.

▲ '둥' 소리로 시작되는 독특한 배경음악과 더불어 각인된 골든하베스트 로고
▲ '둥' 소리로 시작되는 독특한 배경음악과 더불어 각인된 골든하베스트 로고

레이몬드 초우의 영화 흥행을 보는 안목은 대단하여 이소룡이 홍콩에 귀국하였을 때 TV방송에서 이소룡을 보고 미국으로 나유 감독의 부인인 유랑화를 보내 계약하게 한 것은 그의 뛰어난 안목을 말해준다. 그의 캐스팅이 아니었다면 이소룡의 홍콩영화 컴백은 좀 더 뒤로 미루어 졌을 것이다. 일례로 런런쇼는 이소룡이 찾아가자 다른 일반배우들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고 노예계약서와 다름없는 장기 계약을 제시하여 계약이 무산된 바 있다.

당시 이소룡은 할리우드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던 터이라 레이몬드 초우가 제시한 편당 출연료 만 불의 계약조건에 만족하고 홍콩영화계에 컴백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소룡이 대스타로 성공하자 그의 저택을 마련해주는 한편 그의 영화사를 골든하베스트 내에 따로 두어 공생하고자 했다.

그리고 미국의 워너브라더스사에서 합작 의뢰가 오자 <용쟁호투>를 제작하여 이소룡을 세계적인 스타로 알리고 더불어 그의 회사도 유명회사가 되었다. 이소룡 사후에 여러 명의 이소룡 후계자가 있었지만 성룡을 발굴하여 코믹쿵후영화를 개척한 것도 그이다. 관객들의 취향을 읽고 그가 장르를 개척했던 것이다. 그렇게 홍콩 굴지의 영화사인 쇼브라더스를 앞서는 대회사로 정착한다.

성룡은 <용소야>나 <사제출마>, <프로젝트 A> 등의 쿵푸영화 외에 <베틀클리크>, <홍번구> 등의 합작영화나 <러시아워> 등의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세계적인 액션스타로 발돋움한다. 레이몬드 초우의 뛰어난 안목으로 골든하베스트사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며 홍콩영화계를 이끌었다. 그것은 경쟁사인 쇼브라더스의 몰락을 가져와 쇼브라더스는 제작이 눈에 띄게 줄며 급기여 영화제작에서 손을 떼고 TVB 방송사로서만 주력하게 된다.

골든하베스트는 이소룡(李小龍), 성룡(成龍), 홍금보(洪金寶), 원표(元彪) 등의 배우를 거느리고 그간 600여 편의 무협액션 영화를 제작했다. 그는 영화사 사장은 무릇 좋은 기획자이어야 하며 자본 없이 기획만으로도 영화사를 성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인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신상옥 감독이나 (주)황기성사단의 황기성 사장 같은 예이다.

그는 이후 홍콩액션영화계에 거두로 성룡이나 홍금보, 서극, 당계례(唐季禮) 감독 등의 영화를 제작하며 홍콩영화 전성시대를 펼친다. 그의 활약은 곧 홍콩영화의 전성시대였으며 골든하베스트사의 몰락은 곧 홍콩영화사의 몰락이었다. 그는 2001년 이후로 영화 제작을 중단하고 결국 2007년 11월 중국영화사에 골든하베스트를 일부 매각하였다.

중국의 영화사 청톈(橙天) 엔터테인먼트는 골든하베스트 대주주인 레이몬드 초우 회장으로부터 지분 25%를 2천만 HK$(약 23억 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1970∼80년대 최전성기의 홍콩 영화계를 상징하던 골든하베스트의 매각은 홍콩인들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홍콩영화애호가들의 아쉬움이다.

골든하베스트는 수많은 홍콩 영화인의 출생이며 고향이다. 골든하베스트를 인수한 청톈은 2004년 베이징에 설립된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이다. 그 많은 영화의 저작권이며 이소룡의 영화저작권까지 어마어마한 량의 영화 판권이 동시에 중국자본에 넘어간 것이다. 더 이상 버티기에는 그는 이미 너무 고령이 되었고 그의 나이만큼이나 이미 홍콩영화계는 쇠락기에 접어들며 대세는 기울었다. 그래도 찬란했던 홍콩영화 시대를 이끌었던 그의 이름을 들으면 그 시절 찬란한 홍콩영화의 영광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이소룡을 비롯하여 왕우, 전준, 묘가수, 성룡, 홍금보, 원표 등 수많은 스타를 육성해냈고 홍콩 무술영화를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제5회 아시아필름어워드에서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2012년 제25회 도쿄국제영화제 공로상을 수상했다. 레이몬드 초우는 이후에도 기획자로 혹은 우정출연 등으로 영화 관련 일을 하며 여러 증언을 남겼고 2018년 11월 2일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 1972년 '맹룡과강' 제작발표회에서 이소룡과 (출처: scmp.com)
▲ 1972년 '맹룡과강' 제작발표회에서 이소룡과 (출처: scmp.com)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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