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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같이 공부했던 후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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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같이 공부했던 후배들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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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 캠퍼스에서 '동춘' 촬영
▲ 흑석동 캠퍼스에서 '동춘' 촬영

박승찬 감독은 중앙대 4년 후배이다. 극영화 조연출로 입문해 문화영화 감독을 하고 국군영화제작소에서 감독생활을 한다. 그는 원래가 다큐멘터리스트다. 군 영화를 연출하다가 1986년에 국립영화제작소로 가서 아시안게임 홍보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그 후 프로덕션으로 자리를 옮겨 무척 많은 다큐멘터리를 연출하였는데 아마도 그가 한국의 프로덕션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감독일 것이다. 그만큼 자리도 많이 옮겼지만 작품도 많이 했다는 뜻이다. 때로는 자연다큐까지 만들고 프로듀서로만 일하기도 하고 KTV의 전문위원으로도 일했다.

젊은 나이에 결혼식 주례를 보아 하객들을 놀라게 했는데 하객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그의 달변이었다고 한다. KTV에 가서도 간부회의에서 KTV 프로그램에 대해 브리핑을 해 간부들의 혼을 뺐다는 후문이다. 그만큼 아는 것 많고 경험을 많이 하여 내공을 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말 잘하고 즐기는 것은 따라갈 이가 없는데 그의 입담처럼 프로그램도 수작들이다. 혹시나 공직에 발탁되어 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영원한 PD로 남아 작품 활동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정국 감독도 그 또래인데 학창시절부터 알아본 꿈나무였다. 단편영화를 촬영하여 단골 수상자였다. 나와도 같은 시상식장에서 가장 많이 본 후배이다. 그는 1990년에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부활의 노래>를 만들어 감독 데뷔를 한다. 초기에는 고생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스타일의 <두 여자 이야기>(1994)나 흥행작 <편지>(1997)를 만들고 대학교수로 부임한다. 그러고도 계속 영화작업을 하는 진정한 감독 교수로 자리매김했다.

김의석 감독도 중앙대 출신인데 5년 후배이다. 학생 때부터 단편영화를 무척이나 열심히 만들던 후배이다. 내가 복교를 하니 <쉐도우 복싱>이라는 영화를 만든다고 편집실에서 자주 만났다. 영화적으로 같은 취향은 아니었는데 그가 추구하는 영화는 저 높은 곳에 있었던 것 같다. 베르너 헤어조그 감독을 좋아했던 그이다.

<뫼비우스의 딸>은 내 기억에 무용가의 의식세계를 그린 영화이다. 너무 오래되니 기억이 아물거리는데 그는 특이한 영화세계를 가지고 있어 극영화를 만들면 개성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 싶었다. 그는 영화아카데미를 다니고 <천막도시>, <창수의 취업시대>등의 단편영화 활동을 하더니 드디어 극영화 데뷔를 한다.

데뷔작은 내가 생각했던 이상 높은 영화는 아니었다. 최민수, 심예진 주연의 <결혼이야기>이다. 그도 결국 흥행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나 보다. 어쨌던 그는 대중영화 감독으로 알려져 그 후 계속해 흥행영화를 만든다. <그 여자 그 남자>, <총잡이>, <홀리데이인 서울> 등 때로는 범작도 만들고 때로는 실험적으로 <청풍명월>과 같은 무술영화도 연출한다.

그리고 영화아카데미에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영화진흥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시간이 흐른 뒤라도 그가 만들고 싶어 했던 이상 높은 영화를 보여주리라 기대한다. 그는 분명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감독이기에 갖는 믿음이다.

김성홍 감독은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3년 후배이다. 1956년 부산 출신인데 대학엘 좀 늦게 들어온 것 같다. 학교 다닐 때부터 그가 편집실에서 살았던 기억이 난다. 이리 붙이고 저리 붙이고 내게 보여주었는데 학생영화치고는 꽤 긴 장편영화였다. 그가 영화감독 할 줄 그 때부터 알았다. 그는 될 성 부른 떡잎이었다. 그도 강제규 감독처럼 처음에는 연출부를 거쳐 시나리오 작가로 출발하였다. 나도 참여했던 정진우 감독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의 재촬영시에 참여했었고 <자녀목>에서도 연출부로 활동했었다.

1990년에 그는 황기성 사단에서 <그래 가끔은 하늘을 보자>로 감독 데뷔를 한다. 그리고 몇 편 더 연출을 하고 강우석 감독의 시나리오 라이터로 활동하다가 <투캅스>로 한국 최고의 고료를 받는 작가가 되었다.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 <마이 뉴 파트너>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는데 한국영화의 흥행기록을 넘볼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그 후로도 속 편의 시나리오를 쓰고 주가를 올린 후 자연스레이 그의 꿈인 연출자로 활동을 한다.

이후 그는 스릴러영화에 집착하는데 <손톱>, <올가미> 등의 영화로 한국형 스릴러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이 예스> 이후로 신작이 끊긴다. 그는 뚝심 있는 사나이니 공백기를 딛고 일어설 그의 신작을 기대해 본다.

강제규 감독도 중앙대 연극영화과가 배출한 또 한 명의 걸출한 감독이다. 한때 제일 잘 나가는 감독이었다. 1962년 마산 출신으로 걸걸한 사나이인데 학교 다닐 때부터 유별났다.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는 성적표를 안 봐서 모르겠지만 영화부장을 맡아 바쁘게 오갈 때 알아봤다.

그는 캠퍼스 커플로 탤런트인 후배 박성미와 결혼했는데 이래저래 재주꾼이다. 그도 단편영화를 꽤나 많이 만들었는데 상도 많이 받았다. 서울에서 열리는 한국청소년영화제나 부산에서 열리는 부산단편영화제에서 나랑 같이 여러 번 수상을 하기도 했다. 1983년에 수상한 단편영화 제목이 <땅 밑 하늘 공간>이었다. 그 해 나는 <맥>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시나리오를 쓴다고 했을 때 그가 시나리오만 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처음 합동영화사에서 연출부 생활을 시작했고 동료 감독들의 영화 대본을 써주었다. 김성홍 감독의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곽지균 감독의 <장미의 나날>, 강우석 감독의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 등이 그의 시나리오이다. 모두 흥행에 성공했고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들이었다.

잘 나가는 그 이기에 당연히 연출의 기회가 왔고 1995년 흔치 않은 소재인 <은행나무 침대>로 데뷔하며 한국영화 흥행기록에 도전한다. 그는 물 만난 용처럼 한국영화계의 신기록을 스스로 경신했다. 우리영화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가 모두 그의 연출작이다.

그의 이름을 딴 강제규필름은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만큼이나 커질 것 같았는데 명필름과 함께 MK픽쳐스가 되었다. 중국대륙에 그의 영화가 한 편도 상영된 적이 없는데 중국 사람들은 강제규하면 다 알고 있는 유명감독이 되었다. 불법 DVD 때문인데 어쨌든 그는 해외에서도 유명인이다. 이미 대표작을 다 만들어 버린 그이지만 틀림없이 본인이 세운 한국최고흥행기록을 경신할 1순위 인물이며 한국영화계의 지형도를 바꿀 사람이다. 그들이 있어 나의 학창시절은 이야기 거리가 풍성하다.

흑석동 캠퍼스에서 '동춘' 촬영
▲ 흑석동 캠퍼스에서 '동춘' 촬영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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