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8 20:00 (일)
[안태근의 다큐세상] 박재용 한국다큐멘터리학회 감사
상태바
[안태근의 다큐세상] 박재용 한국다큐멘터리학회 감사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2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0년 전남 무안읍의 박재용 감사의 집에서 왼쪽이 박재용 감사
▲ 2020년 전남 무안읍의 박재용 감사의 집에서 왼쪽이 박재용 감사

박재용 한국다큐멘터리학회 감사는 대학의 후배이다. 편의 상 그를 박 감사로 지칭한다. 지금부터 쓰는 글은 아주 특별한 인연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50주년을 앞두고 있은 2007년 정기총회 자리에서였다. 같이 학교를 다니지 않아 서먹할 수도 있는데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수십 년 지기처럼 금방 친해졌다. 당시 나는 EBS를 퇴임하고 광주의 호남대 교수발령을 받은 터인데 그는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에 근무하며 광주에 살고 있었다.

동문회를 마치고 헤어지면 그만일 터인데 그와 만남은 계속되었다. 심지어는 광주의 원룸을 얻고 그가 와서 이사를 거들어주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사이 우리는 또 광속도로 친해져 있었다. 서울서 짐을 싣고 내려온 아들 준영은 군 전역을 하고 복교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박 감사는 준영이 졸업한 서울교대부속초등학교 선배였다. 그런데 내년에 복학할 C대에 막내딸이 재학 중이었다. 더구나 준영이와 같은 학과이니 세상에 이런 우연이 어디 있을까?

이삿짐을 정리하고 박 감사는 준영이를 터미널까지 데려다주며 딸의 선배로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연이 되려니 박 감사와 나는 몇 년 후 사돈지간이 되었다. 처음부터 신의 계획은 다 되어 있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내가 광주로 온 것이나, 이러저런 우연을 핑계로 한 필연적인 일들이 펼쳐질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하니 내가 광주로 간 것은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한 신의 포석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끊어져도 그만일 일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박 감사는 광주에서 나의 활동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단순히 학교 선배라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인데 특강의 기회나 여러 모임에 나를 참여시켜주었다. 나 역시도 그를 학교의 연구회에 초빙하여 함께 할 시간을 가졌다.

물론 결혼이라는 중대사는 이러한 인연만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디딤돌을 놓아준 것은 확실하다. 나는 사회생활의 능력이며 남도음식의 솜씨하며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며느리의 진면목을 보고 이 특별한 인연의 해피엔딩에 다시 감사한다.

박 감사는 1997년 졸업 후 줄 곳 지역에서 방송콘텐츠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서울 MBC의 2002 월드컵 특집 생방송 <생방송 월드컵이 좋다>(2002)를 연출하고 2003년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으로 이직하였다. 그리고 17년간 근무하며 콘텐츠진흥팀장, 전략기획팀장을 역임하였다. 내가 호남대에 근무하던 시기인데 그가 있어 타향이 낯설지 않았다.

그가 운영 중인 전남 무안군 일로읍의 55아트센터
▲ 그가 운영 중인 전남 무안군 일로읍의 55아트센터

그는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퇴임 후에 무안의 100여 평 창고를 활용하여 많은 문화콘텐츠 수집품을 전시하고 미술작가들의 초청 기획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는 55아트센터로 명명된 이곳의 대표를 맡아 문화운동 기획자로 거듭나고 있다.

문화기지 ‘55아트센터’의 미술작가 기획전
▲ 문화기지 ‘55아트센터’의 미술작가 기획전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