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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 스토리] 나의 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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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 스토리] 나의 길에 대하여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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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1월 27일, 한국영상자료원 극장을 대관해 세미나를 시작했다.
▲ 2010년 11월 27일, 한국영상자료원 극장을 대관해 세미나를 시작했다.

살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초지일관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세태에 따라 쉽게 변하는 것이 우리 마음이다. 또 사심(私心, 邪心)으로 무수히 변해가는 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이다. 사심이란 사사로운 마음 또는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私心)이라는 뜻과 바르지 아니한 간사스러운 마음( 邪心)을 뜻한다. 두 가지 의미 모두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사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늘의 성인이라며 몰라도 인간 모두에게는 사심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조선조의 이방원이나 세조가 가졌던 큰 의미의 사심이 아닌 인간적인 사심은 누구에게나 존재할 것이다.

나는 일은 물론이고 사람을 사귀며 사심을 갖거나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다. 그리고 올바른가를 따져 마음의 결정이 내려지면 유불리 계산을 하지 않는다. 특별한 철학을 가진 것은 아니고 타고난 심성과 바른 교육을 받아서일 터인데 성격적으로 솔직하고 곧기 때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백치>의 주인공 정도는 아니지만 사심에 관한한 그 수준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스스로가 택해서 걸어온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오로지 설정된 길을 가며 딴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긍정적인 성격이라 그런지 딴 생각 없이 그저 일단 결정되면 믿고 오픈 마인드로 묵묵히 나의 길을 걸어왔다. 나의 끈기를 지켜본 지인들도 인정하고 있다. 이소룡 세미나를 2010년 11월에 시작해 13년간 143회를 개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의 길이라면 일찌감치 정해진 영화인의 길이다. 신상옥 감독의 <꿈>(1967)이란 영화에 매료되고 안양영화예술고로 진학을 목표로 결국 중앙대 연극영화학과까지 갔다. 부모님은 결사적으로 내가 영화인 되기를 막았지만 나는 결국해냈다. 그리고 영화인 되기를 말린 분이 바로 중앙대 이응우 지도교수님이다. 그것은 모두 나를 아끼는 마음에서였다.

그만큼 한국에서 영화인 되기는 힘든 일이다. 한국에서 영화인 되기는 생계문제부터 존재감에 대한 자존감을 포기해야 하는 가시밭길이다. 일반인들로서는 견뎌내기 힘든 현실이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은 좀 나아졌다지만 열정 페이를 견뎌내야 하는 상황이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나를 이 길로 이끌고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심이 개입되고 또 다른 복심이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청소년기부터 시련기를 견뎌내고 당연히 영화인이 되었다. 그리고 십 년간의 시련을 딛고 의미 있는 영화 일을 하였다. 그사이 많은 영화계 멘토를 만났다. 이소룡을 비롯하여 만난 순으로 정진우, 신일룡, 임권택, 신상옥, 정창화, 이두용, 바비김, 권영문, 이우석, 박우상... 나의 영화계 멘토들이 주는 영향을 컸다.

나는 31살에 <한국의 춤 살풀이>로 영화감독 데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방송PD로 영입되기 전 5년간 내가 하고 싶은 제작(연출)이란 일을 실컷 할 수 있었다. 방송국 가서도 그 원풀이는 천여 편을 만들게 했고 내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으로 방송되었다. 그야말로 정해진 목표를 향해 일로매진했다.

이런 내게 무슨 딴 생각이나 사심이 있을 수 없다. 그저 묵묵히 나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것은 먹고 살만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부모님에게 의존한 것은 아니고 내 인생의 시련기인 감독 생활을 하면서 40여 편의 각본, 감독을 하였다. 그저 열심히 일을 하였기에 먹고 살만했다는 것이다.

PD시절에 나는 무슨 환영에 홀린 듯 『이소룡 평전』을 쓰게 됐고 그 계약금을 받아 2010년 ‘이소룡 세미나’를 개최했다. 책은 2013년에야 출간되었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그렇게 거대한 물레방아가 돌아갔다. 그러면서 운명처럼 ‘안중근 세미나’, ‘한국영화100년사 세미나’ 등이 이어졌다. 세미나의 결과는 또 다른 책들의 출간으로 이어졌고 나는 감투만 여러 개를 맡게 되었다. 다 돈 버는 일이 아니라 돈 쓰는 일인 게 문제라면 문제다. 그 역시도 감당 가능하니 사심 없이 할 수 있었다.

'안중근 세미나'는 EBS 다큐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라!>를 제작하며 안 의사의 유해를 국내 봉환하기 위해 시작된 사업이다. 국가가 할 일을 대신하게 된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직도 유해는 봉환되지 못했다. 이 사업은 개인이 할 일이 아니고 국가가 외교로 풀어야 할 일이다.

‘한국영화 100년사 세미나’ 역시 이소룡 세미나를 개최하며 하게 된 일이다. 그동안 『한국영화100년사』 시리즈를 십 여 권을 출간했으니 어쩌면 나의 영화적 운명을 책으로 풀어낸 느낌이다. 그 모두가 은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EBS PD를 퇴임하고 호남대 교수 발령을 받고 교내에 이소룡연구회를 만들어 기념관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중국 광동성 순더로 투자설명회를 갔다. 잘 풀리지는 않았지만 나로선 그야말로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살아온 인생이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꿈꾸었다면 어쩌면 바보같은 일일 수도 있다. 그 열정을 개인사업에 바쳤다면 재벌이 됐을 거란 이야기도 들었다. 오로지 프로그램 제작을 하고 공적인 사업체를 추진하며 살다보니 어느덧 나이가 70세를 바라본다.

내 나이 55세에 시작한 이런 일들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는 이들은 나를 두고 바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는 사업체들의 목표를 아직은 이루지 못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나는 내 인생을 잘 살았다고 응원해주고 싶다.

다음 회부터는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2010년 11월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의 제3관을 대관해 개최해온 세미나글을 소개한다. 세미나는 주제 발표와 영화 상영, 스타 초청 등 제대로 된 형식을 갖추어 개최되었다. 세미나는 지방대 발령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장소를 바꾸어 가며 코로나 시기에는 줌 원격 세미나로 개최되어 왔다. 이는 매달 1회씩 13년간에 걸쳐 개최되어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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