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이 배출한 후배 감독들 이야기이다. 내가 중앙대 영화전공학생 때이다. 제대하고 복교를 하니 새내기들이 입학하여 있었다. 풋풋한 학생들 가운데 눈에 띄는 후배가 민병관이었다. 부리부리한 두 눈이 일을 낼 느낌이다. 태권도를 해서 일까? 더 믿음직스러웠다. 집은 수원이라고 했다. 나와 영화 이야기 꽤나 했다.
아, 그 때 우리는 UCLA영화과 출신인 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처럼 금방 될 것 같았다. <대부>도 만들고 <지옥의 묵시록>도 만들 것 같았다. 카메라를 들고 흑석동 캠퍼스를 세트장 삼아 “레디~ 고!”를 외쳤다. 민병관은 믿음직스러운 후배였다. 수업도 빼먹고 현장에서 나를 도왔다.
그와 같은 학번의 장현수가 있다. 지성적인 외모에 별로 말은 없지만 내겐 살갑게 굴었다. 이 친구 역시 한 껀 할 친구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학교를 졸업하고 영화아카데미를 다니더니 <걸어서 하늘까지>로 데뷔하고 <남자의 향기>, <본 투 킬> 등의 영화로 충무로에서 제일 잘 나가는 감독이 되었다. <라이방>을 마지막으로 신작을 구상 중인데 공백기가 조금 길다.
어느날 민병관이 고등학교 동기동창라고 좀 투박하게 생긴 제 친구를 데려왔다. 곽재용이다. 경희대 물리학과를 다닌다는데 영화를 배우고 싶다고 한다. 그러더니 이소룡 이야기를 꺼낸다. 무술도 제법한 듯 액션도 할 줄 알았다. 어디에선가 있었던 활극이야기도 펼쳐놓았다. 자기 집에 가서 부모님을 설득시켜달라고 해서 후배의 집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오기도 했다. 아버님을 만나 설득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아버지의 생각은 괜히 영화한다고 고생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텐데 곽재용은 기어코 영화감독을 해내고야 말았다. 한국청소년영화제에서 내가 이정국 감독과 함께 특별상을 받았을 때 그는 <선생님 그리기>로 우수상을 받았다. 물론 나나 이정국 감독이나 이미 이 영화제에서 우수상을 받았었다.
곽 감독은 <비오는 날의 수채화>라는 영화로 이름을 알리더니 <가을여행>으로 유명감독이 되었다. 당시 흥행감독이던 배창호 감독의 기세를 누를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더니 슬럼프가 있었고 이후 절치부심하여 만든 <엽기적인 그녀>로 그는 적어도 아시아권 감독이 되었다. 이 세 명은 내가 꼽는 수원의 영화감독 삼인방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출중했던 민병관 감독은 아깝게도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시나리오도 잘 쓰고 이두용 감독의 조감독을 거쳐 충무로에서 조감독 인기 1순위, 감독 데뷔 1순위로 꼽혔던 사람 좋은 민병관. 하느님은 좋은 사람부터 데려간다고 했나? 젊디젊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난 그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