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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비법 우리 고향의 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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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비법 우리 고향의 명주'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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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합총서(閨閤叢書)』에 기록된 우리의 전통명주
▲ 『규합총서(閨閤叢書)』에 기록된 우리의 전통명주

1997년은 내 생애 가장 많은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해이다. 설날 특집을 시작으로 부처님오신날 특집, 광복절 특집, 그리고 추석특집, 연말에 다큐 스페셜 촬영까지 그만큼 보람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추석 특집 <비법 우리고향의 명주>는 전국의 좋은 술을 찾아 소개하는 다큐였다. 우리 입맛에 가장 잘 맞는 우리 고향의 명주들이 이제는 우리에게서 멀어져 있다. 다음은 「방송문화」 1997년 10월 호에 실린 글이다.

언제부터인가 고유명사가 돼버린 ‘세계화’, 박찬호와 선동렬의 눈부신 활약으로 우리 사회에 새롭게 던져진 화두인 ‘세계 속의 한국’. 21세기를 목전에 둔 현 서점에서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이러한 용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 것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리라. 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보면 세계는 있되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우리가 추석특집으로 <비법-우리 고향의 명주>를 기획한 것은 이러한 시의성을 갖는다.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 만족만의 고유한 문화를 복원하고 그것을 세계화 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 민족만큼 술을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기쁨이나 슬픔을 함께 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술이 있었다. 우리 술의 기원을 정확히 밝히기는 어려우나 단군신화에 단군이 한 해 농사를 마치고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술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술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 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술상에서 우리의 술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우리 술의 대명사가 되다시피한 막걸리도 이제는 애써 찾아야만 마실 수 있는 술이 되었다. 농촌 들녘에서조차 막걸리가 외면당하고 있다하니 아득한 추억의 한 장이 훼손되는 듯한 안타까움이 앞선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의 술 소비량은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많다. 하지만 연간10조원에 이르는 주류 시장에서 전통 민속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0.3%정도로 지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수입양주가 들어앉아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우리 술에 대한 이해부족은 아닌지.

지난 1986년 정부는 뒤늦게나마 46종의 전통민속주와 기능보유자 64명을 발굴, 이 가운데서문배주의 고 이경찬 옹, 두견주의 박승규 씨, 교동법주의 배영신 씨 등 세 명을 중요무형문화재 ‘향토술담그기’ 제조기능보유자로 인정했다. 10여 년이 지난 현재 전통민속주는 국가지정 26종 등 총 300여 종이 넘는 전통주들이 지정 보존되고 있다.

1986년 문배주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을 때 나는 기능보유자 고 이경찬 옹을 방문했고 처음으로 문배술을 맛 볼 수 있었다. 그때 입안을 싸고 돌던 배 향기는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당시 고 이경찬 옹이 중국의 마오타이, 죠니 워커, 문배술 세 가지를 놓고 맛을 비교해보라 하셨을 때, 나는 그 맛뿐만 아니라 그분의 자신에 찬 눈빛에서 우리 술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전통민속주는 그 제조방법에 따라 크게 약주와 소주로 구분할 수 있다. 재료들을 숙성, 발효시킨 것이 약주라면 그 약주재료를 소주고리를 사용하여 증류시킨 것이 소주, 곧 증류주이다. 우리민족의 발효 기술은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 발효비법으로 빚어진 술이니 그 맛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또 지역에 따라, 담그는 이의 손맛에 따라 사용하는 부재료에 따라 그 맛이 모두 달라지니 까다로운 현대인의 기호를 충족시키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전통민속주 중 가장 오래 되었다는 계명주는 경기도 남양주의 최옥근 여사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AD 430년 경 북위의 산동 태수 가사협이 썼다는 『제민요술』에 따르면 고구려의 대표적인 술로 계명주를 들고 있다. 밤에 빚어 새벽닭이 울 때 마셨다는 계명주는 고기를 즐겨 먹었던 고구려인들의 식성에 맞게 단맛이 돌며 걸쭉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 맛의 비법은 누룩을 조청에 개어 삼베자루에 넣은 후 5일간 발효시키는 과정에 있다. 최 여사의 남편은 멧돼지를 사육하며 직접 식당을 경영하는데 멧돼지 고기에 곁들인 계명주는 일품이었다.

박승규 씨에 의해 계승되고 있는 면천 두견주는 이름에서 이미 드러나듯 진달래가 그 맛과 향의 비결이다. 또 충남 당진군 면천면의 안샘우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박명인의 세심한 정성이라 할 수 있다 진달래의 양을 조절하는 일과 발효 온도를 정확하게 유지하고, 증류된 술은 다시 50일간 창고에서 숙성시키는 과정에서 박명인은 장인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충남 청양에서 한 가문의 비법으로 전승되는 구기자주는 아직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로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전통주로서 손색이 없는 술이다. 특히 인삼에 버금간다는 구기자 외에도 각종 약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훌륭한 건강보조 주류(?)가 된다. 그러나 판로가 없고 재정 지원이 없는 관계로 생산을 하지 못한다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일명 ‘신선주’로 불리는 계룡 백일주는 말 그대로 백일 동안 빚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수를 통해 뽀글뽀글 솟아오르는 백일주의 영롱한 빛깔은 전통적 아름다운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또 기능보유자인 지복남 할머니와 며느리가 오순도순 나누는 정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땅 끝 해남의 진양주와 제주도의 오메기술은 남도 특유의 향취를 머금고 있었다. 이 두 곳 역시 생산 라인은 갖추지 못하고 전통적 제조법 그대로 소량만을 생산하고 있었다. 옛날 궁녀들이 빚어 마셨다는 진양주는 별다른 부재료를 사용하지 않는데도 꿀을 넣은 것처럼 맛이 달아 여성들의 기호에 맞는 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의 오메기술은 오메기떡을 재료로 사용하는데 오메기떡은 과거 제주도인들의 주식이었다고 한다. 떡으로 술까지 빚었던 선조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가지 언급한 약주외에도 화면에 담지 못한 유명한 약주로는 한산 소곡주, 아산 연엽주, 김천 과하주, 경주 교동법주 등이 있다.

약주를 증류시킨 소주류는 보존기간이 길어 온도가 높은 여름에는 대부분 소주로 제조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소주는 진도 홍주였다. 허화자 여사가 전승하는 홍주는 지초라는 약초를 사용하여 붉은 빛은 내는데 좋은 지초를 구하기 위해 충북 제천의 새벽시장까지 간다고 하니, 그 정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주 이강주는 조정형 씨의 노력으로 과학화 되고 있다. 가업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대학에서 발효학을 전공한 조명인은 전국의 전통주들을 현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으며 그 산물들을 책으로 펴 낼 정도로 열성적이다. 이밖에도 우리의 특산품인 인삼을 갈아 40일 이상 저온 발효시켜 빚는 금산 인삼주, 전통적 제조비법을 고수하면서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안동소주 등이 대표적인 소주이다.

마지막으로 세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전통주인 문배술이 있다. 현재 전통주 시장의 70%가량을 점유하고 있으며 연간 매출액이 200억을 넘는다는 문배술은 제조비법의 현대화에 성공한 예이다. 우리의 전통주들이 살아남기 위한 한 가지 해답을 문배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애써 찾아야만 맛 볼 수 있는 전통민속주, 우리 체질에 맞고, 문화에 걸맞았던 술들을 만난다는 것은 당연히 그렇게 살아가야 할 민족 본래의 모습을 마주하는 일일 것이다. 대량생산으로 폭넓은 주류층을 확보하기보다는 좋은 재료와 오랜 정성을 따라 빚어온 민족 고유의 전통술 철학은 물질문명이라는 가치 속에 취해버린 현대인들에게 삶의 의미까지 생각게 한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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