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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K군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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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K군의 인생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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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어린이대공원으로 놀러간 친구들 사이에 K군
▲ 1977년, 어린이대공원으로 놀러간 친구들 사이에 K군

아직 다 산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삶을 통해 지난 반세기를 회고해 본다. 그를 통해 지난 반세기를 회고하는 이유는 그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스무 가지 정도의 직업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와 나는 중학교 동창이다. 영화 관람을 남만큼이나 좋아했던 그는 부잣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중산층 가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에야 형제 많은 것은 다반사였고 제 먹을 것은 타고 난다고 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그는 왕십리에 살았던 둘째형의 집에서 인근의 광희중학교를 다녔고 사회에 진출했다. 형들이 많다보니 잘 사는 형도 있었다. 그가 처음 가게를 연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살 때였을 것이다. 1974년경인데 압구정동에서 선물가게를 시작했다. 당시 압구정동 길은 포장이 안된 진흙탕 길이었다. 상가의 한 코너에서 시작한 사업이 잘 됐던 것 같지는 않다. 남대문 시장에서 물건을 받아다 이문을 붙여 파는 것인데 금방 접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청년이 하기에는 따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1975년에 중부시장에 있던 큰형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친구 중 제일 먼저 군대를 갔다. 1977년에 제대를 하고 나서는 강남에 있던 셋째형의 부동산 사무실로 출근을 한다. 당시는 강남개발이 되며 복부인들의 활약이 슬슬 알려지던 때이다. 돈 있는 분들은 돈 좀 벌던 때이다.

그리고 자기 사업을 한다고 형의 강남 빈 땅에 야구연습장을 차린다. 야구연습장은 지금도 눈에 띄는데 그 때는 스트레스를 그렇게 해소했다. 1978년 즈음의 일이다. 그래서 내가 군대 가서 휴가 나왔을 때 양주를 사기도 했다. 당시에는 제법 장사가 됐던 것 같은데 부동산 사무실에 나갔던 그로서는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사업이라고 할 수는 없어 트럭을 한 대 구입해 지방으로 다니며 운수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친구들 중에 맨 처음으로 장가를 간다. 상당히 어린 나이에 장가를 간 것인데 자기가 돈을 버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신혼생활을 지금은 금싸라기 아파트가 된 개포동 1단지 주공아파트에서 시작한다. 그러다가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난 게 1982년경이다. 당시 이민 붐이 불었는데 하필이면 지구 반대편으로 가 반 년간 슈퍼마켓에서 짐꾼을 했다.

당시 700만 원을 가지고 갔는데 아파트를 처분한 돈이었다.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가족을 불러들이려는 의도였지만 영국과의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난다. 그는 볼리비아로 가서 3개월을 더 버티다가 귀국을 했다. 이민 간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고 또 그 전쟁에 졌으니 참 억세게 재수 없는 경우이다. 말이라도 통하면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으련만 그렇지도 못하고 그에게 이민은 위기의 상황으로만 끝났다.

9개월간의 이민생활이 그에게도 별 소득 없이 끝났지만 그간 국내에 있었던 그의 식구들이 겪었을 고생담과 마음고생은 말도 못했다. K는 귀국하여 처음에는 가족을 데리러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도 저도 잘 안되어 다시 국내에서 자리 잡기로 하고 다시 사업을 시작한다.

그의 이민을 독려했던 둘째 형의 도움으로 아파트를 구입했는데 당시 아파트 가격이 지금 같지는 않았지만 비쌌을 텐데 그는 새로운 사업을 위해 새로 산 아파트를 처분한다. 그리고 셋째 형과 시작한 사업이 당시 붐이 불었던 룸살롱이다. B라는 극장식 주점으로 박경희 등의 가수를 불러다 시작한 업소는 그런대로 잘 되었는데 4년 결산은 부도이다. 어음깡으로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다시 트럭을 사서 횟감고기를 도매로 넘기며 조그마한 송어횟집을 방배동에 오픈했다. 당시에는 경기가 좋았었다. 가게엔 손님들이 가득했고 여기저기서 화투판이 벌어졌다. 일하는 아주머니들에게 선심성 팁이 오갔다. 1990년대 초쯤의 사회상이다. 놀러간 우리에게도 횟감이 푸짐하게 차려졌다.

그러나 한 2년 운영하더니 다른 이에게 넘기고 또 무언가를 했는데 별 재미를 못 보았고 큰형이 하던 슈퍼에서 부부가 같이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러나 경기가 예전만은 못했다. 그것도 이삼 년하고 그는 친구 따라 의류사업을 시작하는데 결론적으로 별 재미를 못 봤다. 너도나도 소자본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사업이었지만 만만치는 않았던 것이다.

경기도 안산으로 이사까지 하며 시작한 그 사업의 끝은 다시 서울 귀경으로 이어졌고 택시운전으로 새 출발을 했다. 그가 개인택시를 하다가 대학로에 국숫집을 차린 게 10년 전쯤이다. 한 3년간 운영을 하더니 또 접었다. 경기가 너무 안 좋다는 핑계이나 실제가 그랬다. 월세 내기도 빠듯한데 적자를 계속 내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자기 차가 없으니 월급 운전기사이다. 그러나 이젠 몸도 예전 같지 않아 쉬기를 밥 먹듯 하니 벌이가 시원찮았다. 그는 멀리 캐나다로 갔다. 딸이 먼저 가있는데 설거지 알바 수입도 월 300만 원은 된다며 현지 적응을 타진키 위함이다. 자주 만나진 못하겠지만 나는 가서 새 인생을 개척하라고 권유했다. 그라면 능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꿈 또한 귀국 후 접었다. 이번엔 나이 탓이다.

그때그때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쨌든 포기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나 새 인생을 개척한 그를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버님 세대처럼 큰 전쟁을 겪지는 않았지만 힘든 세월의 부침 속에서 사업도 부침을 겪었지만 꿋꿋이 격랑을 헤쳐 온 그이다. 또 무엇이 두려울까? 앞으로 그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곡절은 없을 것이다. 설마 있다하더라도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용사답게 멋지게 극복해 낼 것이다. 지난 반백년을 허리가 휘도록 힘들게 살았지만 그로해서 이제 남은 세월을 편안히 쉬면서 지내라고 말했다.

비록 아내에게 고생은 시켰지만 아들도 야구선수로 키웠으니 뭐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삶이다. 그는 다른 욕심을 버리고 지금은 처남 가게에서 운송차량을 몰고 있다. 대략 훑어본 그의 지금까지의 삶인데 다른 이들 같으면 쉽게도 풀렸을 삶이 그에게는 꼬인 실타래처럼 잘 안 풀렸다. 나도 다섯 가지 정도의 직업을 거치며 생존력을 키웠는데 그는 나보다 네댓 배는 더 경험을 하였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인생 상담을 할 수 있는 내 친구 K 화이팅!!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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