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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프랜차이즈 가마치 통닭의 김재곤 회장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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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프랜차이즈 가마치 통닭의 김재곤 회장 ②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3.01 1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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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태근 회장(왼쪽)과 가마치 통닭의 김재곤 회장(오른쪽) 
▲ 안태근 회장(왼쪽)과 가마치 통닭의 김재곤 회장(오른쪽) 

가마치 통닭의 프랜차이즈 회사인 (주)티와이의 김재곤 회장의 두 번째 인생이야기이다. 그는 1958년 2월 12일 전북 고창에서 출생하였다. 그곳은 전기가 안 들어와서 석유 등잔을 사용할 정도로 낙후된 시골마을이었다. 아버님은 빚과 가난을 벗어나고 자식 교육을 위해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했고, 사당동의 산동네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3만 원의 전세 집이었는데 단칸방에서 6식구가 칼잠을 자며 어렵게 생활을 했다. 다만 서울로 와서 쌀밥을 먹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부모님은 시장에 나가 생닭을 팔았다. 그렇게 서울 생활에 안착을 하며 서울에서의 생활은 자리 잡는 듯했다.

그러나 친지의 소개로 열게 된 이문동 가게에서 불행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그해 10월은 무척 추웠다. 새로이 연탄아궁이에 불을 피운 부모님은 연탄가스에 그만 운명하시고 말았다. 오래된 연통이 삭아서 가스가 새어 나오며 꼼짝없이 당한 억울한 죽음이었다. 네 아이를 남겨둔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이럴 수는 없다고 말을 되뇌며 돌아가신 표정을 그는 읽을 수 있었다. 당장 3만 원 전세방에서 어린 네 명이 살아갈 방법은 없었다. 누이는 친척집으로 두 동생은 고향의 큰집으로 내려가며 생이별해야 했다.

홀로 남은 15살 소년은 무엇이든지 해서 살아야 했다. 그래야 다시 동생들을 불러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라면으로 겨우 허기진 배를 채우던 어느 날, 그를 찾아온 육촌형의 가게에 나가서 운명적으로 닭 일을 시작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육류였다. 그는 가게에서 자면서 배달 일을 했다. 소년이 타기에도 부담스러운 짐자전거를 타며 도심의 거리를 달렸다. 그것만이 살 길이라는 믿음이 그를 버티게 해주었다. 때로는 북악스카이웨이의 식당까지도 오르막길을 달렸다. 육촌형이 오토바이로 배달하던 곳이다. 코피를 쏟아내며 그는 악착같이 달리고 달렸다. 그 고통의 시간을 견디게 한 건 남은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육촌형의 이유 없는 폭력에 그는 가게를 나가 마시지 못하는 소주를 컵으로 마셨다. 새삼스럽게 서러움이 끓어올랐다. 복싱까지 했던 11살 연상인 형의 폭행보다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동생들에 대한 생각에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신문배달에 뭐에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그는 자신의 한 몸조차 편히 쉴 곳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죽으면 끝이었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에게 남은 동생은 이제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로서는 이를 악물고 버텨내야만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에게 희망의 빛이 보였다. 명륜동의 성균관대 앞의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하며 남영동의 자동차기술학원을 다니며 정비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기술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반 년 과정의 그 일은 고된 일과와 함께 하였지만 그로서는 즐겁기만 했다. 그러나 꿈은 단숨에 이뤄지지 않았다. 턱 높은 합격률에 결국 자격증을 따지 못하고 수료로 끝났다. 그로서는 어떻게든 자격증을 따야 했고 결국 성년이 되던 20살에 1종 운전면허증을 땄다. 그에게는 새로운 삶을 살기위한 희망의 면허증이었다.

그는 1977년에 운전면허를 따서 택시운전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16만 대의 차량이 운행하던 시절인데 수입이 좋았다. 아침에 나가 밤늦도록 피곤한 줄 모르고 핸들을 잡았다. 수입도 좋아 그로서는 목돈을 만질 수 있었다. 그러나 돈을 모으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골에 살고 있는 동생들의 학비며 생활비며 쓸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축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고향을 찾아갔을 때 차마 이야기하질 않았던 동생들의 눈길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못살아도 같이 있고 싶어요.”

그가 다시 서울로 향할 때 배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멀리서 숨어 바라보던 동생들의 눈길이 서울에 와서도 선했다.

그는 형의 가게에서 다시 배달 일을 시작했다. 수입이 좋았던 택시운전에 상응하는 월급을 주겠다는 말에 그도 선선히 응했다. 그런데 그것이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두 번째 불행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밤 늦은 비포장길을 달리던 그는 졸음운전에 그만 교통사고를 냈다. 차가 가로수를 들이받으며 그만 전복되고 만 것이다. 그도 50바늘이나 꿰매었고 친구는 차창 밖으로 튕겨나갔으나 다행히 뼈하나 부러지지 않았다. 젊어서 버티어 냈지만 그에게 이러한 강행군과 중노동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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