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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영화 벗 당룡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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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영화 벗 당룡 ③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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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룡은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에서 이소룡 대역으로 데뷔했다.
▲ 당룡은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에서 이소룡 대역으로 데뷔했다.

그는 두주불사형인데 조금씩 오래 마시는 스타일이다. 체력이 필요하고 몸이 축가는 주법이다. 평생 독신으로 고독을 벗 삼아 고추농사 지으며 살았던 그는 벗이 그리웠을 것이다. 국악을 하셨던 부친의 영향으로 노래에도 일가견이 있고 담배도 즐기던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영화뿐이었다. 영화를 이야기 할 때 그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만큼 그의 인생은 영화 그 자체였다.

그가 귀국하고 몇 달 전에 방문했을 때 새로운 사업 구상을 이야기 했다. 가능한 것도 있었고 불가능한 것도 있었는데 그만큼 새로운 의욕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그가 갑자기 위독하다는 것을 제10회 이소룡기념사업회 정기 세미나 도중에 알게 되었다. 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지 불과 1년만의 일이다.

그가 2011년 8월, 소식도 없이 귀국하여 급환으로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비보를 지인이 당룡 카페에 올렸다. 마침 이소룡 세미나 모임을 갖던 우리들은 믿기지 않는 급보에 모두 놀랬다. 그가 입원한 안산 고대병원으로 갔을 때 그는 이미 의식불명이었고 결국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는 일주일 전에 귀국하여 연락도 없이 있다가 느닷없이 안산 고려대 병원에 입원하였고 입원 후 23시간 만에 사망하였다. 이제 그를 떠나보내며 그를 잊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팬들에게 한없는 그리움을 남기고 이소룡처럼 우리 곁을 떠나갔기 때문이다.

당룡은 8월 26일(금) 자정, 친구인 김동수 설악개발시스템 회장과 늦은 저녁 합석을 한다. 귀국한지 9일 정도가 지났을 때이고 귀국한 것은 8월 17일로 8개월 만이었다. 그는 김동수 회장을 만나러 전 날 안산으로 왔고 인근의 숙소에서 쉬고 있던 참이다. 그는 김 회장의 전화를 받고 식당으로 왔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지쳐보였고 그날따라 진땀을 흘리며 흰 모자를 벗어 부채질까지 하였다.

그는 술도 마다하고 11시 즈음 복통을 호소하며 먼저 일어나 자리를 떴으나 밖으로 나와 식도정맥류성 각혈을 하고 벤치에 누웠다. 그를 배웅하던 두 후배는 급히 119 구급차를 불러 당룡을 인근의 안산 고려대병원으로 옮겼다. 그때가 자정 무렵이다.

후배들보다 약간 늦게 병원에 도착한 김동수 회장은 그대까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입원절차와 보증금 문제로 치료를 안 하고 있던 병원 관계자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응급실로 옮겨진 당룡은 치료를 받던 중 27일 새벽 1시에 심한 출혈을 하였다. 출혈은 검은 피로 간경변에 의한 것이었다. 놀란 치료진은 전공의와 간호사뿐이었는데 응급실 안쪽의 공간으로 옮겨 치료를 시도했으나 당룡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 때 이미 당룡은 사망상태나 다름없었고 수혈을 24통이나 하였지만 이미 회복 불능상태였다. 병원 응급실의 주치의(전공의)는 간경변(간경화)를 조심스럽게 진단했으나 휴일인 관계로 각종 검사를 한 상태는 아니고 그럴 상황도 아니다.

내가 그의 위독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세미나 날인 29일 토요일 오후 4시 경이었고 네이버 당룡 카페를 통해서였다. 당룡 카페에 위독 사실을 올린 사람은 김 회장의 조카딸이다. 나는 세미나 초청스타인 권성영 배우와 관객과의 대화를 5시 반 경에 마치고 서둘러 안산 고대병원에 도착하니 7시경이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그는 이미 의식불명 상태였다. 그때는 소변활동도 안되고 저혈압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주치의는 99% 사망을 진단했다. 즉 위독한 상태인데 친아우 김 기자는 안양 샘병원에 영안실을 준비하고 10시 경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당룡은 그날 밤 10시 46분에 호적 상 향년 56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수원의 연화장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은 11시경 의왕시청 옆의 오봉정사에 안치되었다. 오봉정사는 찾기 쉬울 뿐더러 서울 인근지역이다. 길고 지리했던 장례식이 이로써 모두 끝났다. 고인의 운명은 슬프지만 큰 괴로움 없이 승천한 것은 축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는 급사한 것하며 명확치 않은 의문사인 것도 이소룡의 죽음과 닮아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은 공통점을 갖기도 한다. 모든 일은 다 원인이 있고 반드시 전제 조건이 있다. 고전명구의 다음과 같은 말로 지금 이 심정을 추슬러본다. 배가 뜨고 꼭지가 떨어짐은 다 그 때가 있는 법. 선부체락, 자유기시(船浮蒂落, 自有其時).

2011년 9월 24일(토) 제11회 이소룡기념사업회 세미나는 당룡의 추모세미나로 김동수 회장을 모셔 마지막 날에 대해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1시부터 영상자료원에서 있은 그의 추모세미나는 황정리, 장일도 배우를 비롯하여 유가족 및 지인, 그리고 팬들이 참석했다. 유품 전시를 비롯하여 그의 일생을 반추해보는 시간이었다.

2011년 9월 24일(토) 개최된 당룡의 추모세미나
▲ 2011년 9월 24일(토) 개최된 당룡의 추모세미나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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