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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채희성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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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채희성 작곡가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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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성 작곡가
▲ 채희성 작곡가

채희성 작곡가는 나와 1997년 휴먼 다큐멘터리 <다큐 이사람>을 제작할 때 음악을 맡아 같이 프로그램 제작을 했다. 벌써 20년 전이다. 그의 고향은 우리 아버님 고향 근처인 황해도 사리원이다. 그는 1943년생인데 1947년생으로 호적신고 되어있다. 6.25를 겪은 세대의 흔한 일이다.

그는 어머니와 1.4후퇴 때 피난 나와 경상북도 영주에서 중학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서라벌예고를 다녔다. 그의 꿈은 오페라 가수였는데 형편이 뒷받침되지 않아 서라벌예대 음악과를 다니며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밤무대에서 노래를 시작했다. 그 때 나화랑 선생을 만나 그의 작곡 사무실에서 머물며 제자 겸 조교로서 가수지망생들을 가르치며 생활했다.

그렇게 2년 반을 보내다가 김동진 작곡, 조영식 작사곡인 <목련화>와 백영호 작사‧작곡인 <지금 말하리>, 그리고 반야월 작사 송운선 작곡의 <불행한 행복> 등을 취입하는데 1963년의 일이다. <지금 말하리>가 당시 전국 인기곡 집계 방송 차트에 2위까지 올랐지만(음악동아 1985년 9월호 ‘소리를 만드는 사람’ 코너 참조) 결국 그는 직접 노래하는 것은 접는다. 이유는 많겠지만 밤무대 가수로서의 환멸이었다. 밤무대를 서며 이것저것 부딪치는 일이 많았을 텐데 밤업소의 주먹패들과 마찰이 불가피했던 모양이다.

결국 가수로서의 꿈을 접고 제자를 양성하는 선생님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 일도 갈등이 많은 일이었다. 갈등의 이유는 실력이 안 되는 가수 지망생들이 당시 유행이던 콩쿠르대회에서 크고 작은 상을 받고 찾아오는 것 때문이었다. 인생의 황금기에 젊음을 바쳐 선택한 길인데 노래지도 보다도 올바른 인생지도가 우선되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엄격하고 혹독한 트레이닝으로 많은 제자들에게서 ‘칼’ 같다는 소리를 들었고 그 소문으로 그는 가수를 깍는 ‘칼’로 불렸다.

그는 한때 타인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여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고 입산수도를 하였는데 정말 그럴 수 있겠나 싶다. 산 속 움막에서 영화 <바람의 파이터> 주인공 최배달처럼 운동을 하며 음악가로서의 삶을 잊으려 했다는데 2년 후 하산하며 들은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를 듣고 문득 고압선에 감전된 듯한 강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2년 간 그가 입산수도 끝에 얻은 것은 음악과의 절연이 아니라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악과의 운명적인 끈인 셈이었다. 그는 개인사업을 하면서 다시 가수를 조련하는 일을 시작한다. 그의 제자는 신인가수들 뿐만이 아니라 이미 활동하는 기성가수들까지도 포함된다. 채 작곡가를 거치면 더 잘 할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인데 그동안 거쳐간 제자만도 수백여 명은 안되겠나 싶다. 탤런트 신신애, 박영록, 이동준 등도 그에게 지도를 받아 신보를 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가수와 그 지망생들을 위한 학교였는데 아직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래서 더 바쁜 그의 발걸음이다. 그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부회장으로서 활동하면서 세계저작권협회 서울대회(2004 CISAC world congress seoul)란 큰 행사를 치러내기도 했다. 그가 협회를 위해 쏟는 정성은 자신의 일보다 우선한다. 그래서 지금도 감사직을 맡아 백의종군하고 있다. 또 영화음악가협회 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올곧은 성격의 그에게 감사직은 그를 상징한다. 항상 정의로움을 추구하며 문제의 소지를 파악해 해결하고 회원들 간의 갈등을 슬기롭게 풀어낸다. 때로는 약속 없이도 오가며 만났던 그였는데 요즘은 만남이 뜸해졌다. 새로이 옮긴 음악 스튜디오도 가본지 오래인데 아무래도 코로나 탓이다.

김상진
▲ 김상진

그의 신당동 스튜디오에서 김상진 가수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나보다는 우리 아버지가 즐겨 부른 <고향이 좋아>의 가수인데 녹음을 마친 후였다. 우리는 어울려 인근의 노래방에서 그의 히트곡을 합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 나의 노래를 듣고는 내게 더 나이 들기 전에 애창곡을 녹음하라고 권했다. 아직 컨디션을 핑계로 하지 못하고 있는데 더 늦기 전에 숙제를 해야 할 듯하다.

그는 그동안 작곡자들의 최종완성작업인 편곡자로서 수천 곡 작업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정작 자신의 곡을 쓰질 못했는데 작곡가로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아쉬움을 절감하고 본인 작곡을 시작했다. 송대관의 <혼자 살아봐>, 김상진의 <아줌마> 등을 발표했는데 아직도 많은 곡들이 가수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곁에서 나를 독려해주고 작사가로서 나의 머리를 올려준 이도 그이다. 앞으로 출반될 그의 신곡들을 기대해 본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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