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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감정평가사 이영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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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감정평가사 이영민 교수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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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전화를 걸어 “안 감독, 뭐해?” 할 것만 같은 이영민 선배님(왼쪽)
▲ 지금도 전화를 걸어 “안 감독, 뭐해?” 할 것만 같은 이영민 선배님(왼쪽)

EBS PD시절, 매주 일요일마다 산행을 했다. 코스는 정해져 있는데 북한산이다. 산악회 이름은 거북이산악회이며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동문들이 주축이 된 산악회이다. 1990년 초부터 산행을 시작했고 회장은 이영민 교수였다. 이 회장은 거북이산악회의 회장을 10년간 역임했는데 그 기간 내가 총무를 맡았다. 총무의 일은 당시 입장료를 내고 식대를 연말 정산하는 일이다.

이영민 회장 별세 후에는 임우평 회장이 회장을 맡았으나 그 분도 별세하셨다. 이 산악회는 지금은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동문산악회인 끼사랑산악회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거북이산악회는 한참 때 회원이 30여 명을 넘기도 했는데 회원으로 홍정도 회장, 임우평 선배, 반대규 대표, 오명환, 이영국 PD 그리고 탤런트, 연극배우 들이었다.

이 교수는 함흥 출신으로 1.4후퇴 때 내려와 수송국민학교와 선린상고를 거쳐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3기생으로 졸업했다. 그 때만 해도 연극영화학과 졸업하고 현장에 나가면 밥 굶기 딱 좋은 시절이었다. 중앙대 졸업하고 충무로에서 영화 조연출을 했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전공을 바꿔 다시 학교를 다니고 감정평가사 자격증을 땄다.

당시에 감정평가사는 모두 백 명이 안 되는 시절인데 한 명이 강남구 전체의 토지 보상평가를 담당했다 한다. 인기 최고의 직업을 택한 것이다. 그는 토지 평가 일을 하면서 동부이촌동의 아파트에서 살면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영화였다. 중앙대 신방대학원을 다니며 필생의 한 작품을 남기고 싶은 열망은 자연 현장에 진출한 동문들과의 교류였다. 나와의 만남도 내가 충무로에서 영화감독 하던 때였다.

그가 동문들 중 제일 잘 나간다고 했던 시절이었는데 '태평양미디어'라는 문화영화사 등록을 마치고 내가 연출한 영화 <귀항>을 금관상영화제에 출품하여 작품상을 받았다. 나는 보너스로 이 선배와 함께 사이판에 함께 놀러가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철판을 수놓는 어머니>로 금관상영화제에서 다시 작품상을 받았다.

그는 본업인 감정평가사 일 외에 경기대, 건국대에서 부동산학을 강의해 우리는 그를 이 교수라고 불렀다. 자연 우리 영화 멤버(패밀리)와도 가까워져 매일 만나다시피 하며 교류하며 비디오 영화를 제작하며 제작경험을 쌓았다. 그는 별세하기 전까지 영화감독을 꿈꾸며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동국대 영화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는 만학도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내게 큰 자극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양재동에 사무실을 얻고 극영화사 등록 후 극영화 제작에 착수했다. 수원 요지에 있던 그의 땅 천 평을 팔아 영화를 제작하기로 한 것인데 오디션을 통해 주‧조연을 선정하고 겨울 인서트까지 찍었다. 그가 각본을 쓰고 연출하고자 했던 <귀지가>는 원시부족사회를 배경으로 사랑과 모험을 그린 강제규 제작의 영화 <단적비연수>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물론 그가 먼저였다.

그렇게 오랜 시일을 두고 준비했던 그 영화는 <그 남자는 이승에서 살기를 거부했다>라는 제목으로 최종 탈고되었다. 수원 땅도 계약이 되어 본격 촬영을 앞두고 있는데 덜컥 간암 판정을 받고 수술 며칠 만에 타계하셨다. 평소에도 간경화로 건강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급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영화제목도 특이 했지만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듯한 영화제목이 모두를 숙연케 했다.

추운 겨울, 자유로 끝 한쪽 길목에 그는 영면하였다. 나와는 같은 아파트에 살며 작은 일 하나에서부터 말 못할 고민까지를 나누며 동고동락했던 이 선배. 그의 죽음은 나로서도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콘티를 짜고 자신의 영화에 대한 포부를 열정적으로 피력하던 그에게 영화란 과연 무엇일까?

먹고 살기 위해 영화를 접고 다른 본업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끝내 못 이룬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던 이 선배. 나는 “영화가 뭐라고 그러시냐?”며 “그냥 편안히 사십시오.”라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그저 선배의 일이 내일 인양 도와드렸는데 왜 한번쯤 말릴 생각을 못했을까?

영화 일을 본업으로 하시는 분들보다 더 영화에 빠져 있던 분. 그에게 영화일은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나를 끔찍이도 아껴주며 점심, 저녁으로 전화를 주던 이 선배. 지금도 “안감독, 뭐해?”하며 전화가 올 것만 같다. 그는 나의 일에도 금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행동으로 보여주었기에 그 영향으로 대학원 진학을 결정할 수 있었다.

유족은 선배의 관에 <그 남자는 이승에서 살기를 거부했다> 시나리오를 같이 넣어드렸는데 지금 쯤 저 세상에서 개봉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를 하기 위해 성격도 바꾸고 영화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던 이 선배. 한 평생을 두 가지 일로 열심히 사신 선배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빕니다.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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