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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③ 류관순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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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습니다] ③ 류관순 열사
  • 안태근
  • 승인 2021.06.23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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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관순 열사
▲ 류관순 열사

류관순 열사는 1903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군(당시 지명)에서 아버지 류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오남매 중에 둘째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러일전쟁 및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국가 위기의 질풍 속에서 살았다. 1905년에는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그리고 이곳 저곳에서 의병투쟁이 시작되었고 일본군은 의병부대를 공격하며 교회를 방화하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목천군에서도 여러 학교가 설립됐고 교육활동도 활발히 시작됐다.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다. 1913년 12세인 류관순은 선교사인 사애리시(史愛理施/Alice Hammond Sharp)의 주선으로 공주영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류관순은 1915년 서울 이화학당 1학년에 편입하였고 1918년 3월에 보통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 유학생 400여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2.8 독립선언)을 선포했고 이어 한국에서 1919년 3.1운동이 발발했다. 2학년이었던 류관순은 학교를 나와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시위운동은 광무황제 국장례가 거행된 3월 3일에는 자제되었다.

3월 5일 류관순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친구들과 함께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3월 10일에는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그녀는 3월 13일 고향 천안으로 내려 왔다. 류관순은 고향에 독립운동의 열기를 전하였고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고 인근 마을을 다니면서 시위운동에 참여를 권유했다.

3월 31일, 류관순은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고 4월 1일 아우내 만세시위를 부모님을 위시하여 일가 친척들이 나서 함께 시위를 주도했다. 그녀는 일경에 체포됐고 오빠 류우석도 공주에서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부상당해 붙잡혔다.

5월 9일 류관순은 공주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6월에는 주동자들과 함께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이에 따라 류관순과 이들은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6월 30일 그녀는 경성복심법원 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류관순은 상고를 포기하고 1920년 3월 1일에 옥중 만세운동을 주동했다. 그녀의 끈질긴 독립에 대한 의지를 일제도 꺾을 수 없었다. 반년 후인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그녀는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 파열로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녀의 나이 19세였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류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혔다. 그리고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장례식이 거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러나 이 공동묘지는 이후 개발돼 그녀의 유해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광복 후 건국훈장 독립장(서훈 3등급)을 추서됐는데 다른 독립유공자들에 비해 현격히 낮은 등급이었다. 2019년 정부는 늦었지만 1등급으로 승격하였다. 그녀의 동상은 남산 초입에 세워져 있고 천안시청과 그녀의 고향 교회에 기념관이 있지만 그녀의 명성에 비해 역시 초라한 규모이다. 겨레의 자유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한 목숨 바친 류관순 열사에 대한 보훈, 이대로 좋은 것일까?

▲ 안태근 박사
▲ 안태근(문화콘텐츠학 박사,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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