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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대륙에 떨친 우리의 민족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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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나의 다큐멘터리 제작-'대륙에 떨친 우리의 민족혼'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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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 떨친 우리의 민족혼' 촬영 현장에서
▲ '대륙에 떨친 우리의 민족혼' 촬영 현장에서

<대륙에 떨친 우리의 민족혼>은 “끈질기게 이어져 온 민족혼의 생명력!! 우리의 민족혼은 과연 무엇일까? 청산리역사대장정 대원들과 함께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 상하이의 애국청년 윤봉길 의사, 하얼빈 의거 안중근 의사 등 항일독립투사들의 흔적을 뒤쫓아 가며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민족혼을 일깨운다!!”를 화두로 풀어낸 다큐멘터리이다.

2011년 8월 15일에 방송된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사)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의 ‘청산리 역사대장정’을 동행 취재해 우리 민족이 5000년 동안 잦은 외세의 침략에도 자주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우리의 민족혼을 만나보았다. 제작 의뢰는 받았어도 나의 기획으로 다시 풀어낸 다큐이다.

2011년 6월 26일 충남 홍성군 용봉산 수련원에서 64명의 대학생을 비롯한 사회저명인사를 포함한 105명의 대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청산리 역사대장정' 발대식을 가졌다. 첫 탐방지로 충남 예산 윤봉길기념관에서 애국청년 윤봉길 의사를 보았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 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1930년 10월 18일 망명지 청도에서 쓴 서신)

윤봉길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그의 민족혼을 그려 보았다. 부모의 사랑, 형제의 사랑, 처자의 사랑보다 윤봉길 의사에게 더한 사랑은 바로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생애, 애국에서 비롯한 목숨을 바친 업적, 그리고 그를 통해 대원들의 마음속에 조금씩 움트는 민족혼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대원들은 중국으로 향했다. 당시 역사대장정은 10박 11일간 고구려의 수도 졸본성과 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발해 성터 등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한 후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 오르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또한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 김좌진 장군 구거주지, 한중우의공원, 실험소학교, 윤동주 생가, 하얼빈 역 안중근 의사 저격 장소, 여순감옥 등을 방문하여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독립선열들의 고혼을 느끼고 돌아왔다.

안타깝게도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의 흔적임에도 지금은 모두 중국에 위치하지만, 우리는 중국 대륙에 서려있는 우리의 민족혼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청산리역사대장정 10기 대원들이 찾은 중국의 동북지방인 만주는 애국 독립선열들의 피와 땀이 서린 곳이다. 김좌진 장군을 포함한 선구자들은 사재를 털어 만주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다. 아직도 그 흔적이 그곳에 남아 있다.

화룡시 청산리는 김좌진 장군 휘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되어 1920년 10월 21일 부터 26일까지 일본군 5만여 명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 곳이다. 완루구에서 시작된 전투는 백운평,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고동하에 이르기까지 5박 6일간 지속됐다.

그곳에 항일 투혼의 상징 청산리독립전쟁승전기념비가 우뚝 솟아있다. 청산리독립전쟁승전기념비는 청산리대첩의 승전을 기념하고 항일무장투쟁을 하다 희생된 이름 모를 대한독립군의 넋을 기리고자 한국정부의 지원으로 건립됐다. 91년 전 나라를 되찾고자 목숨을 다했던 김좌진 장군과 독립군의 항일 투쟁의 민족혼을 시공을 뛰어넘어 함께 느껴볼 수 있었다.

마지막 일정으로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여순 감옥을 찾았다. 여순 감옥은 제정러시아가 1902년 설립, 일본이 확장시킨 것으로 중국 동북에서 가장 큰 감옥이다. 주로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많이 수감되어 있었고, 1906년~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한국과 중국의 항일지사와 사상범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이곳에 수감하였고 온갖 고문을 가했으며 수많은 수감자들이 형무소 안에서 처형당했다.

여순 감옥을 둘러 본 대원들은 안 의사가 수많은 붓글씨를 남기고, 책도 썼던 독방을 쇠창살 너머로 바라보았다. 박창현(당시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3학년) 대원은 “안중근 의사는 말 그대로 의사라는 말이 어떠한 말을 표현하는 것인지 표본처럼 행해주신 분”이라고 했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나라를 걱정하는 헌신적 정신과 태도를 그의 순국지에서 지금도 느낄 수 있다.

안 의사는 순국을 앞두고 “국권이 회복되거든 나를 고국 땅에 묻어 달라”고 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 의사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후손들을 위해 희생한 안 의사의 숭고한 민족혼을 기억하며, 우리는 그의 유언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다큐멘터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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