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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신일룡 배우 라이프 스토리 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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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신일룡 배우 라이프 스토리 ⑪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6.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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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홍콩영화계로 진출한 신일룡
▲ 1970년대 홍콩영화계로 진출한 신일룡

그는 남산초등학교 졸업 후 신당동에 있던 광희중학교를 다녔다. 중앙시장 근처의 학교로 성동공고와 함께 있었다. 그 시절부터 지금의 태권도인 당수도를 배우러 다녔다. 그의 후배인 박승준 D산업개발 부회장의 증언이다. 그가 학교를 오가던 길 중간에 중앙체육관이 있었으니 그가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하다. 당시 중앙체육관에는 당수부는 물론이고 권투부, 유도부 역도부(지금의 헬스 클럽) 등이 있었고 필자도 광희중 재학 시절인 1970년에 유도부 관원이었다.

1970년에 그는 영화계에 데뷔한다. 그것은 어쩌면 정해진 운명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던 그에게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의 무용담은 당시 명동을 주름잡던 신 상사파에게 관심을 받기에 충분하였지만 정작 그를 부른 건 배우 데뷔를 시켜준 신상옥 감독이다. 명동을 오가던 그를 보고 직원을 시켜 부른 것이다. 대감독이 스타성 배우를 알아본 것이다.

신 감독의 사무실로 들어온 그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큰 키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은 배우로서 첫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운동을 하고 거리 싸움을 하며 갖게 된 자신감이 그를 단단히 받쳐주고 있었다. 게다가 형형한 눈매에 호남형의 얼굴에 빙긋이 웃고 있는 그에게 신 감독과 함께 있던 최은희 배우는 이미 합격점을 주었을 것이다.

“웃옷 벗어봐!” 신 감독이 조수현을 만나 던진 첫마디다. 그로서야 그렇지 않아도 보여주고 싶은 몸매인지라 옷을 훌떡 벗고 자신의 근육을 보여주었다. 마치 보디빌더가 시합에 나간 듯 여러 포즈를 잡았을 것이다. 신 감독은 단숨에 그의 스타성을 알아보았다. “너 영화배우 할래?”라는 그 물음에 “얼마 줄 건데요?”라고 답했다는 그이다.

신 감독이 “얼마 줄까?” 되묻자 당당하게 집 한 채 값을 불렀다는 그이다. 그에게 돈은 사치를 위한 것이 아닌 절박한 필요성이 있었기에 절로 나온 답이었다. 돈은 생존을 위해 절대적이라는 것을 그는 절박한 하루하루를 살며 몸으로 체험했던 그이다. 어렸을 때부터 구두닦이며 신문 배달, 아이스케키(ice cake) 장사 등 돈벌이라면 안 해본 것이 없는 그이다. 신 감독과의 첫 만남과 배우 데뷔 역시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실향민의 아들인 그가 얼마나 돈벌이를 갈구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신 감독은 집 한 채 값을 전속금과 출연료로 지급하였다. 처음에는 긴 전속기간을 주문하였지만 영악한 그는 거절하였고 2년으로 조정되었다. 신 감독은 신인배우 캐스팅에서 보다 처음이고 겪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한 마리의 용이 되라고 자신의 성과 일룡이라는 예명을 지어 선물했다.

신인배우인 그는 촬영을 하며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지만 신 감독의 배려 속에 하나씩 배워가며 데뷔작 촬영을 마친다. 이미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경험했던 그에게 영화 역시도 극복해나가야 할 것 중의 하나로 무난히 촬영을 마쳤다. 그에게 행로에 후퇴나 포기는 없다. 그리고 후속작 <평양폭격대> 역시 대배우들과 공연하며 영화 연기의 모든 것을 습득해나갔다.

그는 전속기간이 끝나자 다른 영화사에 캐스팅되고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 나갔다. 데뷔 3년차인 1972년, 장일호 감독의 <인왕산 호랑이>를 촬영하던 시절 “야!”라고 그를 부르는 L선배와 방문을 걸어 잠그고 험악한 상황 직전까지 간 그이다. 이름이 있는데 아무리 후배라도 “야!”는 더 이상 못 듣겠다는 그이다.

이후 그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고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감독이라도 마찬가지인데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그는 당당히 맞섰다. 감독이 사과하거나 해야 하지만 안 그럴 경우에는 촬영 중단까지 가니 그의 주변에서는 찬바람이 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그런 것은 아니고 후배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게 그이다.

그는 영화계 데뷔 이전부터 당수도를 수련하였고 홍콩에 진출하여서는 김진팔 관장의 합기도 도장에서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촬영한 화보사진은 주간지에 대서특필되어 소개되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도전자들은 그가 상대해야 했다. 도전자는 일격필살로 끝내야 했기에 대결은 싱겁게 끝났다고 한다. 체격적으로도 우월하고 청소년 시기부터 무도를 익힌 그이기에 당연한 결과이다. 그는 최종적으로 합기도 5단으로 되어 있다.

이쯤이면 세기의 스타인 이소룡 못지않은 무도 캐리어를 쌓았다. 어쩌면 비슷한 과정을 거쳐 무도인이 되었고 영화계로 진출하였으니 똑같은 운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잘 난 남자들의 똑같은 행보이며 흡사한 행로이다. 신일룡 배우는 이소룡의 컴백 시기보다 1년 빨리 데뷔하였고 잘 생긴 외모에 멜로영화, 전쟁영화 등 여러 장르에서 활동하였지만 액션장르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이러한 그를 액션영화 감독들이 그냥 놔 둘리 만무하다. 1975년에 <죽음의 승부>를 감독한 박우상 감독은 “신일룡 배우야 말로 몸매, 잘 생긴 외모로 한국에 그런 배우가 없었다.”고 한다. 함께 일하려 했을 때에 홍콩에 가 있어서 캐스팅하지 못해 아쉬웠다고 회고한다. (2022년 6월 6일 인터뷰)

그가 홍콩에서 귀국길에 부모님께 드리기 위해 사온 우황청심환이 밀수품으로 적발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로서는 좋지 않은 기사로 대중에게 귀국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좋았던 이미지에도 구김살이 갔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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