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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신일룡 배우 라이프 스토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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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신일룡 배우 라이프 스토리 ④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6.0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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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청계산에 모인 황정리, 이두용, 신일룡, 필자
▲ 2013년 청계산에 모인 황정리, 이두용, 신일룡, 필자

그는 한국영화100년사 뚜렷한 족적을 남긴 대배우이다. 이는 출연 편수를 떠나 대감독들과 굵직한 배우들과 함께 했던 필모그래피가 말해주고 있다. 네댓 편에 출연하고 요절한 제임스 딘이나 이소룡과도 다르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대부분 흥행성 기획에 의한 멜로영화와 액션영화들로만 보이지만 주옥같은 몇 편의 영화가 그의 명성을 입증하고 있다.

그의 연기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태어나서 연기학원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그이다. 물론 많은 신인배우들이 그와 같은 상황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중도 하차하며 영화계에서 퇴출되고 만다. 불러주는 이가 없고 활용의 가치성이 떨어졌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왜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아울러 그는 당시 한국 최고의 영화제인 대종상영화제에서 1976년 김수용 감독의 <아라비아의 열풍>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 해외영화제에 출품된 검증된 영화들이 들어있다. 1973년에 개봉한 최하원 감독의 <서울의 연인들>로 1974년 아시아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1983년 출연작인 이두용 감독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가 칸국제영화제 특별상을 받은 것이 그 예이다. 아시아영화제에서 꽃이라 할 수 있는 주연상을 데뷔 5년 차에 받은 것은 비단 행운만은 아니다. 연기력이 검증이 되어야 하고 그만한 노력을 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가 하면 홍콩과 인도네시아로 진출하여 그곳에서도 코리언 무비스타의 명성을 떨쳤다. 외국이라는 한계에서 일군 값진 성과이다. 당시 그를 소개한 홍콩 영화잡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외국이라는 환경조건이 그에게 제약이 될 수 없다. 단지 홍콩 시절에 배역에 대한 차별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한국영화이지만 그는 여러 영화를 외국에서 촬영하였다. 1976년 김수용 감독의 <아라비아의 열풍>과 1984년 이두용 감독의 <낮과 밤>이다. 이두용 감독은 그를 외견상 좋은 조건을 갖춘 남성적인 배우였다고 기억한다.

그는 여러 감독들과 함께 하며 그만의 당당함으로 자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에 세 편 연속 출연하며 트레이닝 되었고, 이후에는 배짱과 소신으로 연기를 했다. 감독의 주문에 응하면서 필요시에는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었다. 때로는 마찰도 없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만만치 않은 배우가 되어 있었기에 감독들도 조심스럽게 그를 대했다.

아울러 기라성 같은 대배우들과의 공연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해낼 수 있는 당당함이 그를 승승장구하게 만들었다. 연기는 경연이고 상대역과의 호흡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빛이 나야 한다. 배짱은 세상을 살아가는 첫 번째 조건일 수 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당당하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본인 스스로의 자신감이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신념은 그가 영화연기 전공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한국영화계에서 뿌리를 내린 원동력이었다.

데뷔하며 신상옥 감독의 전속계약에 묶이지 않았던 것도 그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전속제라는 것은 배우로서 발전보다는 영화사가 배우를 묶어두기 위한 방책인데 그는 긴 기간 전속 사인(sign)을 안했기에 데뷔 2년 차부터 전속에서 벗어나 타 영화사에서 많은 감독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감독들도 시대를 망라하여 신상옥, 장일호, 정진우, 권영순, 김기덕, 고영남, 이만희, 이형표, 최은희, 김기, 이기영, 김묵, 이상언, 조긍하, 이원세, 정일택, 박노식, 임권택, 전우열, 이신명, 정소영, 김수용, 최하원, 조문진, 주동진, 이성구, 강대진, 김진태, 정창화, 나유(로웨이/홍콩), 퓨아드 샴술(Fuad Syamsyul/인도네시아), 이경태, 정지영, 박호태, 정인엽, 배창호, 이장호, 이두용 (연출 순) 등 당대 주요 감독들과 함께 했다. 중복하여 함께 일한 감독도 꽤 여럿이다.

그의 활동상을 보면 신상옥 감독의 배우를 보는 안목이 적중했던 것이다. 괜히 집 한 채 값을 주고 캐스팅한 건 아니다. 그야말로 1970년부터 1986년까지의 17여 년 간의 활동이지만 그는 거장들과 함께 했고 한국영화사에서 뺄 수 없는 주요 배우로 자리 잡았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지금과 비교해 비교적 다작을 할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가 만났던 감독들은 그중에서도 정상급에 있던 감독들이다. 정지영 감독의 <여자는 안개처럼 속삭인다> 외에 신인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적은 없다. 신인감독으로서 그를 대하기가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배우로서의 삶은 개인 비즈니스 결과이다. 그의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은 배우로서 빨리 자리 잡고 수많은 유명감독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신인답지 않은 두둑한 배짱으로 톱스타 대우를 받았다. 그의 비즈니스 감각은 이후 광고 출연을 하며 실제 경제활동에서 드러난다. 신일룡은 한 가지를 잘 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배우였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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