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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신일룡 배우 라이프 스토리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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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신일룡 배우 라이프 스토리 ⑤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6.03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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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그의 데뷔작 '이조괴담'
▲ 1970년 그의 데뷔작 '이조괴담'

그가 비즈니스에 올인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어린 시절을 알 필요가 있다. 그는 1947년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출생하였고 본명은 조수현이다. 그의 나이 네 살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어린 수현은 부모님 따라 형제들과 미군 수송선에 타고 월남을 한다. 피난생활의 어려움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서울로 와서 필동에 자리 잡은 그의 가족은 빈털털이로 새 생활을 개척해야만 했다.

어린 수현도 마찬가지 상황이라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 여섯일곱 살의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슈샤인 보이(구두닦이) 뿐이었다. 남대문 시장을 자주 갔던 그가 ‘신일룡의 호두파이’ 매니저 오성림 이사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긴 줄이 늘어선 남대문 시장의 만두집 2층에서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며 건네준 이야기이다. 이는 그의 외양만을 보고 금수저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뜻밖의 이야기이다.

나 역시 실향민의 아들로 태어나 한 방에서 온 가족이 생활하는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어린 수현의 이야기는 그의 성격 형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건 그가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추측된다. 생활력이 강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감이 컸겠지만 슈샤인 보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덩치가 또래보다 컸었기에 가능한 일이고 나쁜 어른들의 시달림도 각오했어야 했다.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낸 신일룡에게 돈벌이와 비즈니스란 막연한 것이 아니고 꼭 성취해야만 했던 목표였다. 그러니 그렇게 평생을 두고 비즈니스에 올인한 것이다.

그는 자아를 갖추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진로를 사업가로 결정했을 것이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근검절약하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돈 버는 것은 당시 모든 어린이들에게 꿈이었다. 나 역시 흰 쌀밥에 참기름 넣은 비빔밥 먹는 게 소망이었다.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의 꿈이 부자 되는 것이었기에 어린 수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추정해보는 것인데 그에게는 더 유독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엄한 부모님의 가르침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란 그가 사업에 대한 열정을 가진 채 영화배우로 성공하게 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다. 그는 집 한 채 값을 계약금으로 받고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위해 집 마련을 해드렸다. 이후 광고 출연을 하며 번 사업자금으로 이태원 하이야트 호텔 부근에서 생애 첫 사업을 시작한다. 그게 바로 레스토랑이었다. 그와 요식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렇게 시작해서 별세 전까지 요식업에 종사하였다.

첫 사업이었던 레스토랑의 이름은 ‘그린 빌’이다. 1970년대 당시 치곤 멋진 상호이다. 인테리어 장식을 위해 외국에 나가 물품을 구입할 정도로 그가 사업에 쏟는 열정은 남다르고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당시 윤정희 배우는 충무로 근처에서 치킨가게를 했었는데 신 배우의 레스토랑이 얼마나 고급진지를 알 수 있다. 그는 그때 이야기를 하며 별 다른 감흥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성공적이거나 대박 난 것은 아니고 그저 첫 사업으로서의 기억뿐인 듯했다.

그의 사업 아이템은 엉뚱하게도 봉제제품으로 옮겨가는데 롯데백화점의 샤롯데 브랜드에 납품을 했다. 당시 수입은 좋았던 것으로 내게 회고했다. 참고로 내가 『이소룡평전』, 『한국영화100년사』 등의 책을 쓴 것을 알기에 해준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는 누굴 만나고나 마치 무용담처럼 자신의 비즈니스담을 들려주었다. 당시 자신의 꿈인 비즈니스 성취로 행복을 만끽했을 것이다. 영화 출연 제의도 넘치고 따라서 들어오는 출연료 역시도 만만치 않았으니 인생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1976년, 홍콩과 인도네시아로 진출한 그의 해외 활동으로 잠시 비즈니스를 접었다. 1980년대 들어서며 국내에 안착하여 영화 출연을 재개하며 시작한 것이 바로 페밀리 레스토랑인 ‘런던팝’이다. 1981년 자신의 사업 수완을 살려 여의도 KBS 별관 근처의 빌딩 지하에 100여 평 규모로 유럽풍 정통레스토랑 런던팝을 오픈한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함박스테이크와 여러 경양식 메뉴를 선보였는데 중가 식당이면서 맛이 좋았다. 교통신문사 기자로 있던 이현숙 씨의 증언이다.“비싸지도 않으면서 맛을 잘 냈다. 다른 데를 기대하고 가보았지만 그 맛이 안 났다.”(2022년 6월 2일 인터뷰)

1981년에 그와 함께 정진우 감독의 <가을을 남기고 사랑> 촬영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면 꼭 전화를 걸어 여직원에게 매상을 확인했다. 참으로 멋진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켜보는 나도 부업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였다. 1983년 런던팝은 용산의 국제빌딩 지하에 2호점을 오픈하고 역시 성공한 식당이 되었다. 그는 사업에 자신감이 생기며 스케일이 커지고 영화 보다는 사업에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 역시도 고수익 사업이기에 포기할 수 없었고, 이 시기는 그로서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형국이었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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