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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신일룡 배우 라이프 스토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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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의 다큐세상] 신일룡 배우 라이프 스토리 ②
  • 안태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22.05.3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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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80년대 베스트 남성 모델 신일룡
▲ 1970-1980년대 베스트 남성 모델 신일룡

그는 주인공으로 데뷔하며 성공한 배우인데 그건 운일 수도 있지만 타고난 마스크와 외모 때문이다. 당시 그의 사진을 보면 부리부리한 눈에서 안광이 나올 정도로 아우라가 강렬했다. 신일룡 배우에게는 여러 궁금한 것이 많은데 그가 받았던 출연료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1970년에 데뷔하며 집 한 채 값을 받았고 이소룡 사후 홍콩으로 가서 활동하며 받았던 개런티도 그 몇 배의 출연료였다고 내게 들려주었다.

당시 인도네시아를 오가며 찍었던 정창화 감독의 <심판자(귀계싸웅)> 이후 인도네시아의 영화계에 초빙되어 거액의 개런티를 받았고, 정창화 감독에게 한턱내었다고 들려줬다. 당시 그에게는 남다른 돈 버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귀국 후에 여러 감독의 영화와 1989년 KBS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에 출연한다. 당시에도 부업이라지만 여러 비즈니스를 하던 때이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그의 관심은 사업인 듯 은퇴 아닌 은퇴를 한 셈이 됐다. 1981년 정진우 감독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촬영 당시에 레스토랑 '런던 팝'을 운영해 자극받은 나도 부업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아무래도 수입이 불규칙적인 영화를 하기 위해서 부업은 필수적이었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며 유명해진 그가 해태제과에 전속모델이 되며 전속출연료 대신에 대리점을 요구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보통이라면 계약금을 받았겠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그가 경제학과 출신이라면 이해가 될 만도 하다. 해태제과의 ‘브라보 콘’은 지금도 회자되는 CF이다. 정윤희 배우와 함께 한 이 CF는 그가 당시 청춘의 심볼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1980년대 남성화장품 ‘쾌남 루트’의 CF 출연료를 그와 함께 일했던 후배에게 물어봤더니 “삼백만 원 정도 했지요” 라고 한다. 당시 조감독 직원인 자신의 월급이 40만 원 때라고 훗날 광고연출의 귀재가 된 박귀재 감독은 회고한다. 그때 쾌남 루트 CF는 출연자를 바꿔가며 인기를 끌었던 최고의 CF였다. 눈빛이 강렬했던 그에게 딱 맞는 광고였다. 국내 촬영도 했지만 멀리 해외 촬영까지 갔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가 쾌남의 대표 이미지인 건 변함없다.

촬영 현장에서 그는 모든 스태프들에게 잘 해주었는데 빈 말을 붙이기에는 거물배우였다. 당시 영화 개런티는 나도 알 수가 없다. 영화사 사장과 직거래 (비밀계약)했기 때문인데 500만 원 이상으로 추정할 뿐이다. 1984년 김지미 배우가 컴백작인 <비구니>에서 삭발하는 조건으로 당시 최고 출연료인 천만 원을 공식적으로 받았기에 추정해 본 것이다.

CF는 출연료가 높을 수밖에 없지만 2~3일 촬영하는 광고와 두세 달 촬영하는 극영화와는 당연히 사례가 다를 수밖에 없다. 쾌남 루트는 태평양화학 아모레가 출시한 남성화장품으로 인기가 많았다. 훗날 쾌남 루트는 미스 쾌남, 오디세이로 신상품이 개발되었다. 출시 초창기에는 남보원도 출연하여 찰스 브론슨 흉내를 내었다. 그뒤 현길수 배우도 출연하고 신일룡 배우가 가장 오랜 기간 출연을 하였다.

신 배우는 (주)동방기획에서 1985년 경 로마, 그리스, 이집트, 스페인 등 3~4편을 묶어서 1,500만 원을 받고 장기 출장을 갔다고 한다. 당시 일반 공무원 초봉이 40만 원 미만의 월급을 받았던 때이다. 보통 국내 편 쾌남 루트 광고는 야외 로케이션으로 2~3일 촬영했다. 후속타로 출시된 미스 쾌남은 여성에게 사랑받는 컨셉으로 개발된 상품이다. 미스 쾌남이 나오며 신 배우의 출연도 끝났다. 그리고 중성적인 캐릭터의 출연자가 등장했다. 그렇게 쾌남은 한 시대 남성화장품 시대를 풍미했다.

그의 관심은 비즈니스였기에 1990년 종영된 KBS의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는 그의 은퇴작이 되었다. 그는 사업에 올 인하여 ‘시애틀 베스트’ 커피숍을 명동에 오픈했다. 당시 외국 브랜드 커피의 원조인데 그 외 먹거리 사업 등 여러 비즈니스가 그를 영화계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외식 산업이 드물던 시절에 오픈하여 원조가 된 패밀리 식당 런던 팝은 그의 대표적인 성공사례이다.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 안태근 (문화콘텐츠학 박사, 한국영화100년사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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